인천 최대 전문건설업체였던 J토건은 2010년 자금난으로 부도 처리됐다. 창립 20년인 지난 2009년에는 직원 380명에 매출 2900억원까지 기록했던 우량업체였다. 화근은 2008년 중견 건설회사인H사로부터 120억2000만원짜리 도로건설 관련 하청공사를 따내면서 시작됐다.

문제는 '특수 조건'으로 따라붙는 특약에서 불거졌다. J토건이 원도급사와 맺은 특약에는 '을은 본공사 수행 중 발생한 모든 재해에 대해 전적으로 책임지며, 산재사고 발생 및 처리를 이유로 갑에게 추가금액이나 공사기간 연장 요구를 할 수 없다'고 돼 있다. J사 측 관계자는 "발주처에서 착공이 늦어져 공기를 맞추려고 돌관공사(지연된 공기를 맞추기 위해 인력과 장비를 집중 투입해 급하게 하는 공사)를 하게 됐는데, 처음에는 비용을 준다고 했으나 결국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J토건은 이 사업에 뛰어들었다가 사업비 75%에 달하는 89억4000만원의 손실을 보고 결국 문을 닫았다. 수주 계약 2년도 채 안된 시점이었다.

◆ 울며 겨자먹기식 부당특약, 부도로 가는 '지름길'

한눈에 봐도 원도급사인 '갑'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돼 있는 특약들. 하지만 '을'인 전문건설업체 입장에서는 이를 거부할 수가 없다. 익명을 요구한 전문건설업체 관계자는 "하청업체로선 불리할 수밖에 없는 부당한 특약들이 계약서에 적히지만 계속 일감을 따야 하는 하도급 업체들은 울며 겨자먹기로 원도급사 요구에 따를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인제의 한 터널 건설 현장(사진은 기사 내용과 무관함)

현장에서 벌어지는 외부 변수로 공사 기간이 길어지는 것을 을인 하도급사의 책임으로 떠넘겨지는 것은 현장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거의 대부분의 하도급 계약서엔 '공기연장은 불가능'하며 '공사 관련 민원이나 산업재해나 민형사상 책임도 을의 책임'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상세작업공정을 지키지 못하여 진행된 야간작업 및 돌관공사에 따른 공사비는 을 비용으로 수행'(갑·포스코건설-을·B사 계약서)한다는 조건이 달리거나, '현장설명서, 내역서 도면 등에 명기되지 않은 사항이라도 공사시행의 성질상 당연히 시공하여야 할 부분은 을이 이행'(갑·서희건설-을·D사 계약서)한다는 사례도 흔하다.

심지어 전시나 재해와 같은 특별한 상황에서도 공사비와 보증금(계약금의 10%)을 받아내지 못하는 황당한 경우도 발생한다.

강성주 전문건설협회 고충처리부 과장은 "전쟁이나 재난과 같은 불가항력적인 닥치면 진행 중이던 공사 비용도 못 받고 계약 보증금도 원청사가 가져가게 되는 조항이 들어 있을 정도다"고 말했다.

여주의 한 토목 건설 현장(사진은 기사 내용과 무관함)

◆ 종합건설사들, 앞에선 '상생', 뒤에선 '을' 쥐어짜기

정부는 건설업계 갑을 관계의 불합리한 관계를 바로잡고 불공정 거래를 막기 위해 표준하도급계약서를 만들고 이를 활성화하기 위한 유인책도 내놓았다.

국가를 대상으로 하는 계약의 경우 가점을 주는 것이 대표적이다. 국가계약법 관련 예규, 입찰참가자격사전심사요령에 보면 표준하도급 계약서를 사용할 경우 100점 만점에 더해 가점 중 가장 높은 2점을 추가로 받을 수 있게 돼 있다. 한 건설업계 관계자는 "입찰 결과가 엇비슷하기 때문에 사실상 큰 건설업체에는 놓칠 수 없는 혜택"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종합건설업체들이 겉으로는 표준하도급 계약서를 쓰는 척하며 정부 발주 사업에서 인센티브는 챙기면서, 하청사에 불리한 특약을 걸어 표준하도급계약서를 마련한 취지를 무색케 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성남시의 한 공공주택 건설 현장(사진은 기사 내용과 무관함) 조선일보 DB

대한전문건설협회가 지난해 2월 종합건설업체 표준하도급계약서 사용실태를 조사한 결과 현대건설(000720)·삼성물산(028260)·GS건설(006360)등 13개 종합건설업체가 날인한 126개의 표준하도급 계약서 사용실태를 조사한 결과, 이 중 85개 계약서는 원청업체인 갑에게 유리하게 변형해서 사용했다. 특히 을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는 특약을 설정한 건이126개 중 119개에 달했다.

전문가들은 표준하도급계약서가 가진 맹점을 막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김관보 가톨릭대 행정학과 교수는 "현재 정부가 제시한 표준하도급계약서는 일종의 권장사항으로 인센티브 외에 제재 방안이 마땅치 않다"며 "개별계약서로 분류된 부당특약을 걸러내는 세밀한 법적 감시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종광 대한건설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직접적인 정부 발주와 달리 업체 간에 맺어지는 하도급 계약은 사적 계약으로 분류돼, 정부가 직접 개입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며 "다만 원도급 업체(주로 종합건설업체)가 하도급자(전문건설업체)와 계약을 맺을 때 발주자와 맺은 계약서보다 불리한 계약조건을 맺을 경우 원도급업체 이익을 제한하는 방안 등은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