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5월. 지금은 파산했지만 당시만 해도 영향력이 컸던 글로벌 투자은행 리먼 브러더스는 코스닥기업 UC아이콜스에 55억여원을 투자했다. 2400원에서 2만원까지 올랐던 '작전주' UC아이콜스는 리먼 투자 소식에 다시 한번 급등, 5월 31일 한때 2만7500원까지 치솟는다. 리먼 소식에 개인투자자들이 몰리는 사이, 작전 세력은 주식을 팔아 340억원의 시세 차익을 냈다.
그런데 당시 리먼은 무슨 이유로 UC아이콜스에 투자했을까. 리먼 정도의 회사가 UC아이콜스 같은 기업의 내막을 자세히 알고 투자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검찰 수사 결과, 리먼이 UC아이콜스에 투자한 것은 '검은 머리 외국인'의 작업 때문이었다. 당시 투자 작업을 진행한 증권사 지점장 출신의 브로커 김모 씨는 검찰에 구속됐다.
◆ 검은 머리 외국인 내세우는 이유는?
검은 머리 외국인이란 외국인으로 등록이 돼 있지만 실제로는 한국인이나 한국계 자금인 투자자를 뜻한다. CJ그룹 이재현 회장 일가가 비자금을 외국인 자금인 것처럼 꾸며 주식 투자를 한 정황이 검찰에 포착되며 다시 한번 관심을 끌고 있다. 이 회장 일가는 1000억원대 비자금을 외국인 투자인 것처럼 조작하고 CJ(001040)계열사 주식을 매매한 혐의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증권업계 전문가들에 따르면, 적지 않은 기업이 외국에 개설한 차명계좌를 통해 외국인 지분율을 관리한다. 위치가 가깝고 금융 거래가 많은 홍콩이 가장 많이 이용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기업들이 '검은 머리 외국인'을 활용하는 것은 외국인 투자를 유치하면 주가에 호재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한 증권업계 전문가는 "지금은 조금 시들해졌지만 2000년대 초중반만 해도 외국인 투자금 유치는 주가를 급등하게 하는 원동력 중 하나였다"며"지금도 중견기업, 중소기업은 외국인 투자 유치를 목 말라 하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금융 감독 당국은 지난해 정치테마주 열풍 때도 검은 머리 외국인이 이용된 정황을 파악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정치테마주 M사는 최대주주의 지분 매도 때문에 급락하다가 외국인의 장내 매수 소식에 반등했는데, 이 때 개입한 외국인 투자자가 사실은 국내의 작전 세력이라는 증거를 일부 확보한 것이다. 감독 당국은 이후 대대적인 외국인 계좌 정비에 나섰다.
홍콩의 경우 천문학적 자금이 계좌간 이체를 통해 이동하기 때문에 비자금 등 이른 바'검은 돈' 관리가 수월한 것도 그들 입장에서는 장점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 주가 조작에 이용될 때도 많아
거액 자산가 입장에서는 자산 가운데 일부를 해외에 숨겨놓으려는 유혹을 느낄 수밖에 없다. 세금을 피해야 하고, 좀 더 자유롭게 자산을 관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기업의 향후 전망이 좋다면, 당연히 이 자금은 외국인 투자자금인 것처럼 꾸며져 회사에도 투자된다. 오너인 만큼 기업의 전망을 잘 알 수 있어 투자 수익률은 높은 편이다. 증권업계의 한 전문가는 "기업 전망이 좋다면 회사에 직접 투자하고, 전망이 좋지 않다면 대출회사를 세워 금융 거래시 발생하는 이자 수익을 가져 가는 것이 그들의 방식"이라고 설명했다.
CJ의 경우 오너 일가가 자사주 매입, 지주회사 전환 등 호재를 앞두고 있을 때 차명계좌를 통해 주식을 매수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불공정거래이기는 하지만 적극적인 주가 조작은 아니라고 볼 수 있는 것. 하지만 비자금과 외국에 개설한 차명계좌로 적극적으로 주가 관리 및 조작에 나섰던 전례가 많다.
국내 유명 창투사 H사의 오너는 문모 씨와 함께 퍼시픽얼라이언스애셋매니지먼트라는 이름의 가짜 외국 투자사를 설립하고 상장사 S사 주가를 조작했다가2010년 구속됐다. 2008년 주가 조작 세력과 손잡고 코스닥기업을 M&A했던 재벌가 3세 K씨도 CS증권에서 계좌를 개설한 뒤 외국인 투자자가 주식을 사들인 것으로 위장했다가 들통 났다.
'다이아몬드 게이트'로 논란이 일고 있는 씨앤케이인터도 2010년말 외국 계좌에서 100만주 이상의 매수세가 유입됐다가 이듬해 1월 주가가 2만원 안팎까지 올랐을 때 대거 매물로 나와 "진짜 계좌 주인이 누구냐"는 의혹이 제기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