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관이라기보다 스승이며, 큰 형님 같았던 남덕우 총리
이용만 전 재무부 장관이 본 남덕우 전 국무총리의 리더십
남덕우 전 국무총리님을 생각하며
45세의 청년으로 '검은테 안경'을 쓰시고 재무부 청사에 나타나셨던 장관님을 내가 뵈온 것은 재무부 이재1과장(현 금융정책과) 때이다. 69년부터 4년 11개월간의 재무부 생활을 마치고, 경제기획원 부총리로 가실 때에는 검은 머리가 희끗희끗해 보이셨다.
부임 초, 어떤 기자는 '몇달이나 있겠나?'하고 말하는가 하면, 재무부 직원 중에도 '교수가 뭘 알아'하고 말하는 직원도 있었다.
남 전 장관님은 누가 뭐라고 하든 우리나라의 경제 흐름, 특히 재정금융정책 기틀을 완전히 새로 짜는데 심혈을 기울이셨다.
70년대, 80년대 우리 경제를 '한강의 기적'이라고
한다면 남 전 장관님이야말로 우리나라 경제성장정책(經濟成長政策)의 주역 중 주역이라 말씀드릴 수 있겠고, 그것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두터운 신임과 김정렴 당시 비서실장님의 보이지 않는 지원이 장기간의 정책 수행을 가능케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남 장관님의 재무부 재직시에 느낀 점 몇가지를 회고해 보면, 첫째, 장관이라기보다 스승이며, 큰 형님 같았다.
몸소 수립한 금융과 경제이론을 실천하며, 하나하나 직원들을 깨우쳐 주셨다. 국·과장들의 보고를 받으실 때에도 방금 전 들은 보고내용도 처음 듣는 자세로 지루한 기색 없이 다 듣는 자세였다. 그 과정에서 앞선 보고에서 빠진 것을 보완하셨고, 보고자는 들어주신 것으로 보람을 느꼈다.
둘째, 주중, 주말 없이 끊임없이 정책을 구상해서 '아이디어'를 지시하고, 선진국 사례 검토를 지시하셨다. 자택에 난방시설이 잘 안 되어서 주말이면 종합청사 뒤 내자호텔의 조그만 방을 쓰면서 수시로 불러 작업을 지시하셨다.
셋째, 가계 금융을 필요로 하는 서민과 영세한 중소기업에 도움 줄 방법을 줄기차게 연구하고, 팔로업(Follow up)하셨다.
당시 경제개발계획 추진으로 정책금융 명목으로 많은 금융자금이 (기업 등에) 투입됨에 따라, 서민의 소비금융이 어려워졌는데, '은행 문턱이 높다'는 말이 나올 때 '사(私)금융 시장을 양성화하라'고 지시하셨다. 그 때에 '무진(사설 서민 금융업체)을 손대면 재무부가 피바다 된다'는 경제과학심의회 위원들의 만류를 무릅쓰고 사금융을 양성화하여 연 60%~300%였던 금리를 30%대로 낮췄다.
또, 담보 위주의 대출행태에서 담보없는 중소기업의 숨통을 트기 위해 중소기업신용보증기금을 설립하고 '신용상태 조사보고서'도 제대로 되고 있는지 직접 점검하는 자상함도 보여주셨다. 한편, '주택없는 서러움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시면서 주택금고를 설립, 그 후 주택은행으로 승격시켰고 가구당 300만원씩 융자하여 서민 주택마련의 길을 열어 놓으셨다.
넷째, 깜짝 놀라웠던 일 중 하나는 비(非)정상적인 통화량의 통계를 정상화할 때의 일이다. 당시 우리나라는 국제통화기금(IMF)과의 차관협정에 따라 연간 통화량의 증가한도를 IMF와의 협약에 따라 지키도록 되어 있었다.
기업의 월말 또는 연말 결제자금 수요를 지원하는 과정에서 한도가 초과될 때면, 월말 하루 수치를 줄여 통계를 작성한 뒤 IMF에 전달하였고, 이러한 습성은 상례화되어 있었다.
남 장관께서는 언론에 두들겨 맞을 각오로 정상화할 것을 지시하셨다. 왜냐하면 왜곡된 통화수치를 기초로 한 정책수립은 실효를 거둘 수 없으므로 그간의 통계가 잘못되었다는 점을 발표하고, 이제부터 정확을 기하겠다고 발표하여 모두를 깜짝 놀라게 했고 언론도 이해하고 협조해 주었다.
다섯째, 어느 토요일 오후 부르셔서 장관실에 갔을 때, '바람이나 쐬러 가자'고 해 차를 타고 오산쪽으로 고속도로를 달릴 때 일이다.
'오늘 김학열씨 댁에 문병을 갔었는데 수술해보니 암이 번져서 포기했대'하시면서 울적해 하셨다. 환율조정을 할 때면 당시 김학렬 부총리하고 여러차례 이견이 있었지만(김 부총리는 물가에 미치는 영향 때문에 환율인상을 반대하셨다) 몇차례 반복해서 환율조정의 불가피성을 설명하면 모두 합의해줬는데 가슴아프다 하셨다. 또 은행 인사에 외부개입은 절대 허용하지 않았다. 일례로, 박 대통령께서 '○○○행장 유임시켜 주지'하셨을 때에도 '인사원칙상 안 됩니다'하며 원칙을 고집하자 '그러면 ○○○ (공화당) 당의장에게 사유를 좀 설명해 드리세요'라고 대통령께서 양보하셨을 정도로 인사원칙을 중요시하며, 외부인사의 개입을 절대로 허용하지 않으셨다.
여섯째, 직원들의 아픔에는 내 일처럼 아파하고 쓰다듬어 주셨다. 상호신용금고법을 만들어 인허가업무를 취급할 때 일이다. 이재국 3과의 A주사가 서대문경찰서에 불려가서 고생을 하다가 '20만원을 받았다'고 시인을 하고 풀려났다. 하지만 본인이 극구 부인하기에 장관께 보고드렸을 때, 장관께서는 캐비넷을 열고 부스럭부스럭 하시더니 '금으로 된 행운의 열쇠'를 주시며 '팔아서 변호사 비용에 쓰도록 주세요'라고 하셨다. 살펴보니 '장관 취임 4주년 기념'으로 재무부 출입기자단에서 축하선물로 준 물품이었다. 기자들이 돈을 걷어서 장관에게 선물을 준다는 것은 들어본 적도 없는 아주 귀중한 선물이었다. 나는 눈물이 핑 돌았고, 직원에게 전달했다. 그런데 A주사 본인이 사방으로 조사한 결과 돈을 주었다는 사람의 부인이 국민은행 미아리 지점에서 그 수표를 찾아갔다는 점이 확인되어 수습됐다. 나는 이재국을 떠나면서 직원들에게 이 대목을 설명하다 목이 메어 중단했었다.
일곱째, 너무나 검소하셨다. 중소기업을 시찰하기 위해 지방을 다닐 때엔 한정식을 주문한 뒤 '반찬이 많으니 여기 정종 한 주전자면 되겠구만' 하시었다. 별도 요정이나 주점은 사양하셨다.
여덟째, 국내에서 '화폐금융론' 저서를 최초로 발간했고, 우리나라가 국제사회에서 별로 인정받지 못할 당시에도 외국 인사들은 'DUK WOO NAM(남덕우)'의 경제이론과 개발정책 경험을 높이 인정하였다. 미국의 키신저 전 국무장관이 중심이 된 G7(선진 7개국)의 주요 전직 대통령과 전직 국무총리들이 모임을 가지면서 연사를 고를 때였는데, '한국 경제가 비약적으로 성장하고 있는데 그 주역을 불러서 경제개발정책의 경험'을 들어보자 하여 남덕우 전 국무총리를 초청했다. 연설이 끝난 뒤 남 전 총리는 큰 박수를 받았다.
아홉째, 지시한 정책구상을 주말에 작업한 직원들에게는 무엇인가 주고 싶어 하셨다.
평일에는 많은 사람들과 기자들이 쉴새없이 드나들어 조용한 주말에 작업을 많이 했다. 작업한 결과를 실무자와 같이 댁에 가서 보고드리면 '알았다', '수고했다' 라고만 해도 되는데 포도주라도 한 병 줘서 보내야 맘이 편하신 것 같았다. 직원들을 아끼는 따뜻한 성품이셨다.
열번째, 은행장들은 국제금융사회에서 신용을 유지해야 하는 중요한 자리라는 점을 감안해 최대한 사법처리는 안 되도록 보호하셨다.
장관실에 결재차 갔을 때 남 장관님은 숨을 가쁘게 쉬면서 주먹으로 '소파'만 탕탕치고 계셨다. 장관 결재 없이 국장 전결로 내무장관 앞으로 사채업자들를 고발한 것이 계기가 되어 여러 은행에서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김현옥 내무장관에게 '은행장들을 모두 불러가면 금융기관 신용에 문제가 생긴다'고 하자, 김현옥 장관이 '조사해 달라고 공문 보내지 않으셨나요?'고 하여 사연을 알아보니 사전에 보고가 없었던 사실이 확인돼 노발대발한 사건이었다. 그후 내무부 장관은 불문에 붙였다.
남덕우 전 국무총리님을 기리면서 일부 생각나는대로 적어봤다.
나라가 어렵고 지구촌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우리나라가 발전해 나가는데 남 전 총리님같은 원로(元老) 지도자의 지혜가 그 무엇보다 아쉬운 때이다. 그런 시기에 남 전 총리님이 타계하시어 국가적으로 큰 별이 떨어진 것 같고, 개인적으로도 아쉽고 슬픈 마음 헤아릴 길 없다.
또한 온화한 인품에, 퇴임 후에도 쉬지 않고 나라를 걱정하며 지속적으로 의욕을 갖고 정책대안을 제시하신 모습은 너무나도 존경스럽다. 후진들에게 크나큰 귀감이 되지 않을 수 없다.
2013년 5월 21일
이용 만 전 재무부장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