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모포스(amorphous·비결정 금속)로 창업하겠다고 했죠. 여기저기서 비아냥 소리가 들렸어요. 자존심 상해 한 술 더 떴죠. '10년 뒤에 세라믹으로 일본과 겨루겠다'고 하자 '계란으로 바위 치기를 넘어선 이슬로 바위 치기' 조소까지 받았죠. 하하…."

김병규(金柄圭·57) 아모텍 대표는 1985년 서울대 금속공학과에서 아모포스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아모포스는 다른 금속보다 전자의 이동이 원활하고 발열(發熱)과 전력 소모가 적어 군사·우주 분야의 차세대 소재로 인기를 끌었다. 그의 몸값도 치솟았다. 지도 교수는 "서울대·KAIST에 교수 자리가 있으니 넣어 보라"고 했다.

교수직 제의에 마음이 흔들렸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CEO에게 맞는 적극적인 성격을 가지려고 일부러 동아리 회장, 과 대표까지 했는데 진로를 교수로 돌릴 수는 없다고 생각했죠."

김병규 아모텍 대표가 인천 본사에서 바리스터를 포장한 긴 띠를 살펴보고 있다. 바리스터는 가로, 세로 각각 1㎜의 크기여서 쉽게 잃어버릴 수 있다. 이 때문에 약을 포장하듯이 낱개의 바리스터를 비닐로 감싸 출고한다.

그는 창업에 필요한 마지막 훈련을 위해 스물아홉의 나이로 냉장고 부품 업체인 '유유'에 들어갔다. "대기업에서 말단 연구원으로 시간을 보내느니 중소기업에서 모든 것을 주도적으로 연구를 하고 싶었습니다."

선택이 나쁘지 않았다. 옛 소련의 아모포스 핵심 기술을 습득할 기회가 찾아왔다. 중소기업에 박사급 연구원이 워낙 적다 보니 1991년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한·소(韓·蘇) 과기처 장관 회담의 중소기업 대표로 참여하게 된 것. "모스크바 현장 시찰에 나갔더니 마침 아모포스로 군사 무기를 만드는 연구소였습니다. 연구진을 다시 서울에 초청하면서 아모포스 양산 기술을 배웠습니다."

유유에 들어간 지 10년 만인 1994년 김 대표는 독립했다. 창업 아이템은 아모포스를 재료로 한 PC의 정류기(교류를 직류로 전환하는 장치)였다. 당시 독일 지멘스, 일본 도시바 정도가 아모포스 양산 기술을 보유했다. 김 대표는 옛 소련에서 배운 기술과 독자적으로 개발한 자기장을 활용한 아모포스 양산 기술로 지멘스에 밀리지 않는 정류기를 개발했다.

1999년 날벼락이 떨어졌다. 신수종 사업으로 이동통신 중계기 부품 개발을 총괄하던 임원을 포함해 21명 연구팀 중 18명이 딴살림을 차리면서 퇴사했다. 남은 연구원 3명은 바리스터(varistor·정전기 방지용 휴대폰 부품) 담당이었다.

"교회에서 새벽 기도를 할 때는 용서하자는 마음이 들다가 회사만 오면 울화통이 터지는 일이 석 달간 반복됐어요. 결국 용서하기로 했습니다."

그는 남은 연구원 3명만 데리고 바리스터 개발에 사운(社運)을 걸었다. "물론 중계기 부품보다 휴대폰 시장이 훨씬 큽니다. 하지만 또다시 바리스터 시장을 독점하던 일본 교세라 등 거인과 싸워야 하는 부담과 핵심 인력의 배신으로 직원들의 사기 저하가 큰 문제였습니다."

연구원들과 숱하게 밤을 새우면서 '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었다. 결국 2000년 6월 바리스터 개발을 마치고 삼성전자와 대만 업체 에이서에 납품했다. 연매출 100억원 돌파가 가시화된 그해 말 에이서가 "일부 바리스터에서 전기가 샌다"는 항의가 들어왔지만 다행히도 절연물질로 수 마이크로미터(㎛·100만분의 1m) 두께의 코팅을 하니 누전을 없앨 수 있었다.

누전 사건은 오히려 기회가 됐다. 에이서에 이어 삼성전자도 같은 이유로 김 대표를 찾았다. "당시 삼성은 우리 말고 교세라 것도 썼는데 교세라가 '누전은 우리 때문이 아니고 삼성 공정에서 비롯됐다'고 주장해 난감해하더군요. 우리가 대책을 내놨더니 삼성이 물량을 늘려줬습니다."

아모텍은 2003년 바리스터 시장 세계 1위에 올라섰다. 매출도 2001년부터 4년간 매년 100억원씩 성장해 2004년 530억원을 돌파했다. 김 대표는 차세대 사업으로 자동차 부품용 모터 등을 준비했다. 바리스터와 자동차용 모터라는 양날개로 아모텍은 작년 매출 1800억원을 돌파했다. 계열사 매출을 포함하면 2600억원이다.

"향후 4년 이내에 매출 1조원을 돌파할 겁니다. 일본 교세라·무라타처럼 10조원을 돌파해 한국을 소재 강국으로 이끄는 게 목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