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베냐 플라스푈러 지음|장혜경 옮김|로도스|212쪽|1만4000원

어딜 가나 '일' 이야기다. 남녀노소, 개인 국가를 불문한다. 어느 나라 지도자나 '일자리 창출'을 앞세우고, 청년은 구직의 어려움을, 장년은 실직의 불안을 토로한다. 운이 좋게 직장의 울타리에 든 사람도 사정은 다를 바 없다. '업무 부담' 혹은 '일의 의미와 보람'으로 고민한다.

현대인에게 일은 무엇인가. 저자는 물음으로 시작한다. 다행히도 우리 시대 노동은 구약 시대의 '저주받은 징벌'의 수준은 벗어났다. 마침내 '자아 실현의 수단'으로 논할 수 있게 되었다고 저자는 진단한다. 힘들거나 따분한 일은 기계가 대신한다. 누구나 직업을 선택할 수 있고 필요한 기술을 배울 수 있다. 능력에 따라 성장하고 한 만큼 성과를 인정 받을 수 있다. 적어도 조건으로 볼 때는 그렇다.

이런 노동은 이제 현대인의 최고 '향락'의 자리까지 넘볼 정도가 됐다고 저자는 쓴다. 책의 독일어 원제 'Wir Genussarbeiter'가 그런 경지를 말한다. 'Genuss'란 '즐김' '향유'라는 뜻. 'arbeiter'란 노동자다. 합치면 '노동을 즐기는 사람, 노동을 향유하는 사람'이 된다. 일에서 향락을 찾는 사람. 역자는 '향락 노동자'라 옮긴다.

문제는 이 '향락 노동자'의 무한 질주에 브레이크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대다수가 '향유' 이상으로 노동에 빠져 있다. 휴가를 건너 뛰는 것은 예사고 휴가 중에도 제대로 쉬지 못한다. 못하는 걸까, 안 하는 걸까 헷갈릴 때도 많다. 노동 이외의 다른 '향락'은 이제 절제의 대상이다. 심지어 성적 에너지마저 노동으로 승화한다. 영어에서 말하는 '워커홀릭(Workaholic)', 일 중독자다. 일 중독은 운동 중독과 더불어 오늘날 우리 사회가 유일하게 인정하는, 심지어 장려하고 지원하는 중독이다.

일에 대한 현대인의 이 '리비도적 집착'은 어찌된 걸까. 왜 우리는 탈진할 때까지 일에 매진하는 걸까? 저자는 근원을 프로이트의 욕망 이론에서 찾는다. 인간은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 '향락 노동자'는 일을 통해 인정을 바라는 인간형이다.

여기에 현대 사회의 경쟁 논리가 가세한다. 오로지 성장을 향해 질주하는 현대 사회는 향락 노동자의 야망을 동력 삼는다. 그 사이 개인의 노동은 '자아 실현'이라는 본래의 의미를 잃어버린 채 오로지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한다.

워커홀릭의 노동을 저자는 강박적인 사랑에 비유한다. 충분히 사랑받지 못한다는 느낌 때문에 늘 안달이다. 워커홀릭의 자아는 온통 그의 능력을 평가하는 사람의 손 안에서 끝없이 불안해 한다.

오디션 프로그램은 단적인 예다. 각국에서 인기 절정인 이 프로의 구현 방식은 자아 착취의 지경까지 이른 현대 사회의 경쟁 논리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무조건적인 승부욕, 강박적인 야망은 징후를 넘어 사회의 원칙이 되어버렸다.

어떻게 해야 할까. 저자의 답은 '과도한 행동주의'에 맞서는 '수동성'의 옹호다. "모든 가능성을 가능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강박적으로 활용하지 않을 때에만 우리는 진정 자유롭다." "능동성 옆에 수동성을 가져올 준비가 되어 있을 때에만 우리가 사는 사회 그리고 우리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다." 말이 어렵지만 어렴풋이 알 것도 같다.

그리고 '놓아두는' 법을 배울 것을 권한다. '놓아두기'라고 해서 그냥 중도 포기하라는 말이 아니다. 저자는 "최고 수준의 행위와 결합된 놓아두기의 또 다른 형태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밖으로 나가 당신을 결정하고 유혹하고 침투하도록 내버려둔다. 통제를 포기하고 적어도 일시적이나마 다른 것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진정으로 자율적인 사람은 상황으로 하여금 자신을 결정하도록 놓아주는 사람이다." 그런 뜻에서 놓아두기야말로 진정한 자유라고 쓴다.

그래도 선문답 같다. 저자는 '아이들의 한가로움'을 예로 든다. "아이들은 시간을 초월해 비밀스럽게 모든 것을 결정하는 높은 힘에 자기를 맡긴다. 든든한 버팀목이 있다는 느낌이 들 때에만 인간은 근심 없이 놀 수 있다."

좋은 아이디어도 '선물'이다. "버튼을 누른다고 튀어나오는 것이 아니라 비우고 내려놓을 때 나온다. 잠을 자거나 하릴없이 뒹굴거리거나 공상에 빠지거나 꿈을 꿀 때 선물처럼 주어지는 것이다. 이성의 볼륨을 줄이고 목적 지향적 의지를 꿈결처럼 몽롱한 이완의 상태로 해체할 때 비로소 우리는 정령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창의적인 사람이 하루의 경계 시간에, 즉 아직 깨어나지 않았거나 더 이상 초롱초롱한 정신이 아닌 시간에 작업을 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요컨데, 성장과 진보의 광기 속에서 '놓아두기'야말로 바람직한 전략이자 삶의 방식이라 말한다.

작년 봄 국내에 번역 출간돼 주목을 받은 재독(在獨) 철학자 한병철의 '피로 사회'와 궤를 같이 하는 책이다. 한 교수는 "자아 실현이 아니라 자기 착취의 기세로 질주하는 과도한 노동 강박이 탈진의 위험을 낳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책도 진단은 비슷하다. 해법은 노장 사상의 무위(無爲)론이다. 서구의 전투적인 산업화 논리에 대한 반성이자, 중화제로 동양의 무위와 유유자적을 내세우는 격이다. 분석의 상당 부분을 프로이트 이론에 의존했다는 저자의 고백을 감안하면 뜻밖의 귀결이다. 인간의 근원적 욕망에 따른 필연적 불안과 좌절을 동양적 사유로 치유할 수 있다는 이야기인가? 그 정도라면 딱히 주목할 만큼 새로운 것은 없다.

'악명높은 독일 철학서' 답지 않게 쉽게 읽히는 게 장점이다. 현실의 노동, 놀이 속에까지 침투한 다양한 강박의 징후를 섬세하게 포착해 낸다. 읽다가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부분이 적지 않다. 고통과 섹스, 축제에 대한 현대인의 인식 변화를 다루는 대목은 여러 상념에 잠기게 한다.

문제는 과도한 비관과 손쉬운 처방이다. '놓아두기'라는 해결책도 심오한 듯 허탈하다. 물론 저자도 노동을 통한 자아 실현은 노동 조건과 근본적인 관계가 있다고 스치듯 말한다. 결정적인 조건은 "시간과 여유, 일을 하면서 일과 더불어 기분 좋게 그 안에 침잠할 수 있는 가능성"이라고도 쓴다. 그뿐이다. 책을 덮고 나면, 그 자아 실현에 부합하는 일을 개인은 어떻게 찾고, 기업이나 조직은 어떻게 구현하며, 국가는 어떻게 유도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더 절박하다는 사실만 절감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비교되는 책이 있다. 올초 국내에도 번역돼 나온 '일에서 충만함을 찾는 법'. 영국의 작가이자 문화사상가인 로먼 크르즈나릭이 쓴 책이 그 점에서는 진일보했다. 이 문제에 진지한 독자들은 순서대로 읽어 볼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