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

현대자동차가 올해부터 국내 생산 물량을 줄이기로 했다. 최소 10만대에서 많게는 20만대 수준까지 국내 생산량을 줄이는 것을 전제로, 해외 각국의 공장에서 국내 물량 감소분을 메우는 비상 계획을 세우고 있다. 기아자동차도 조만간 같은 전략을 세울 전망이다. 1997년 외환위기와 2008년 금융위기처럼 신차 수요가 줄어 불가피하게 감산(減産)했던 때를 제외하고는, 국내 생산 물량을 계획적으로 줄이는 것은 창사(1967년) 이래 46년 만에 처음이다. 주간연속 2교대제 도입 이후 주말 특근 방식과 특근비에 대한 노사 갈등으로 특근을 못한 지 5주가 지나면서, 3월 수출 물량이 28% 감소하는 등 타격을 입은 게 1차적인 원인이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고비용·저효율로 고착화돼버린 국내 생산 구조를 더 이상 버틸 수 없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회사 안팎에선 '결국 올 것이 왔다'고 보고 있다.

정몽구 회장 "국내 생산 물량 줄여라"

9일 현대차 고위 관계자는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이 최근 해외 법인장들에게 '국내 생산 물량 감소에 따른 부족분을 해결할 수 있도록 해외 공장별 생산 증대 방안을 짜라'고 직접 지시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올해 국내 생산량이 12만~13만대가량 줄어드는 게 1단계, 20만대까지 줄어드는 것이 2단계 시나리오"라면서 "1단계 수준에선 미국과 유럽, 인도, 러시아 등 주요 공장의 가동률을 높이는 방법으로 보전(補塡)이 가능할 걸로 예상하고 있다"고 확인했다. 현대차 측은 그러나 2단계에선 각 공장 간 물량 이동의 큰 그림(맵·map)을 새로 짜야 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예를 들어 울산 공장에서 만들어 호주로 수출하던 것을, 울산 대신 유럽에서 만들어 호주로 실어 나르는 것이다.

정몽구 회장이 이런 지시를 내린 시점은 주간연속 2교대제가 시행되고도 주말 특근 방식에 합의가 안 돼 2주 연속 생산 차질을 빚은 직후인 것으로 알려졌다. 3월 첫째 주부터 지난 주말까지 5주 연속 주말 특근이 무산되면서, 현대차 생산량이 총 3만4000여대 줄어든 것으로 집계됐다. 이 때문에 지난달 수출 물량도 작년 3월 대비 28% 줄었다. 정 회장은 "작년에 브라질 공장까지 완공해서 이제 해외 네트워크가 완성됐다. (국내에서 이럴 것 없이) 해외 시설을 적극 활용해서 생산량을 맞추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노조에 더 이상 밀리지는 않겠다는 일전불사(一戰不辭) 선언인 셈이다.

이미 미국 앨라배마와 조지아, 체코와 슬로바키아, 러시아 등 현대·기아차 주요 해외 공장은 3교대 근무 체제로 가동률 100%를 넘기는 상황. 생산 속도를 더 끌어올리기 위해 시간당 생산대수(UPH) 향상 방안 등을 마련하는 중이다.

고비용·저효율 생산구조 해답 없어

지난해 현대차만 따지면 국내에서 총 190만대, 해외에서 250만대를 만들었다. 기아차까지 합치면 현대·기아차 국내 총 생산량은 349만대, 해외 363만대로 사상 처음으로 해외 생산량이 국내를 역전했다.

그러나 갈수록 국내와 해외 공장 간 생산성 격차가 벌어지면서, 경제 논리를 따르지 않을 수 없게 됐다는 분석이다. 현대차의 국내 공장과 해외 공장 간 생산성 분석 자료에 따르면, 국내 공장의 HPV(자동차 1대 만드는 데 투입된 근로시간)는 2011년 기준 31.3시간이었지만, 미국 앨라배마 공장은 14.6시간에 불과했다. 중국 베이징 공장도 19.5시간으로 국내 공장의 62% 수준이다. 격차도 계속 벌어져 국내 공장의 HPV는 2007년 30.5시간에서 꾸준히 악화하고 있지만, 앨라배마 공장은 같은 기간 20.6시간에서 29% 향상됐다.

생산성을 가늠해 볼 수 있는 또 다른 지표인 편성효율도 현대차 국내 공장은 2010년 53.5%였지만 미국(91.6%)·중국(86.9%)·인도(88.4%)는 모두 국내보다 높았다. 한국 공장에서는 53.5명이 일하면 충분한 라인에 100명이 투입돼 있고, 미국 공장에는 91.6명이 일하면 될 라인에 100명이 투입돼 있다는 뜻이다. 국내 설비가 상대적으로 노후화돼 있다는 점을 감안해도, 상당한 격차다.

제조업 전반 물량 이전 신호탄 될까

정몽구 회장의 이번 결정은 국내 생산 물량이 줄어드는 것을 감수하더라도 노조에 끌려다니지 않겠다는 입장으로 전략을 수정한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그러나 물량 감축에 대한 노조의 반발과 정치적 파장이 만만찮을 것으로 예상돼, 실제 감행까지는 난관이 많다는 관측도 있다. 산업연구원 주력산업팀 이항구 연구위원은 “물량 이전을 위해서는 라인 재조정 등 쉽지 않은 작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문제는 국내 생산량 감축을 고려하는 곳이 현대차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한국GM은 최근 GM 본사 차원에서 한국 생산 시설을 미국·유럽 등 선진국과 맞먹는 '고(高)비용 국가'로 재분류했다. 종전에는 개도국과 선진국 사이 중(中)비용 국가에 속해 있었다. 세르지오 호샤 한국GM 사장은 지난달 기자간담회에서 "주간 연속 2교대제로 생산시간은 줄어드는데 생산효율성은 크게 늘어나지 않아 생산 비용이 더 많이 들게 됐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상당 물량을 외주화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