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때요. 배추가 참 실하쥬?"
지난 20일 충남 예산군 탄중리의 한 비닐하우스. 파랗게 익어가는 배추가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농민 권태화(62)씨는 배추 자랑에 한껏 들떠 있지만 배추는 사실상 그의 것이 아니다. 권씨는 지난해 말 배추씨를 심은 뒤 산지유통인 강영철(64)씨와 포기당 1500원에 넘기기로 약속하고 대금의 절반을 받았다. 그리고 나머지 대금을 이달 중순에 받았다. 배추를 키우는 일은 권씨가 하지만 엄연히 강씨의 소유물이다. 비료와 농약 대금도 강씨 호주머니에서 나온다. 수확할 때도 강씨가 인부들을 데려와 직접 따간다. 권씨는 "산지유통인이 없으면 배추 농사는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농산물 가격 안정을 위해 유통 단계를 줄이라고 지시한 이후 농산물 산지유통인이 척결 대상으로 떠올랐지만 현실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산지유통인이 유통만 담당하는 게 아니라 생산자, 농민에 대한 대부자, 위험을 대신 떠안는 보험사 기능까지 하고 있다.
충남 예산을 예로 들면 배추밭 70만평을 250개 농가가 농사를 짓는다. 농가당 면적이 3000~4만평에 이른다. 농민 오근환(48)씨는 "부부 둘이서 농사짓는 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일손 부족이 가장 큰 문제인데 산지유통인이 이 문제를 해결해 준다. 이들은 전국을 돌며 농사가 0~30% 정도 이뤄진 단계에서 밭떼기로 농산물 구매 계약을 한 뒤 이후 경작을 도맡는다.
산지유통인은 농산물 운송을 담당하고, 농민들에게 금융 서비스까지 제공한다. 농민들과 계약과 동시에 대금의 절반을 지급하고, 수확 전에 잔금을 지급해 농민들이 생산 비용과 생활비에 쓰도록 한다. 또 수확 단계에서 자연재해 피해를 보면 산지유통인이 손해를 떠안는다.
산지유통인이 많은 이윤을 떼가서 농산물 가격이 올라간다는 주장도 다소 무리가 있다. 2011년 겨울 배추를 기준으로 할 때 평균 가격은 포기당 5227원이었다. 이 중 1200원이 농민, 2076원이 산지유통인, 721원이 도매상, 1230원이 소매상의 몫이었다. 이를 보면 원가 1200원짜리 배추가 5227원에 팔리는 것 같지만, 생산자나 다름없는 산지유통인 몫인 2076원까지 사실상 배추 원가로 봐야 한다. 결국 농산물 유통 경로를 '농민→산지유통인→소비자' 3단계로 축소하면 판매 가격을 크게 낮출 수 있다. 농식품부 관계자는 "고령화된 농촌 현실을 감안할 때 산지유통인을 없애기는 어렵다. 산지유통인을 대형화, 조직화해서 소비자와 직거래하게 만드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