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말 신용등급이 AA-(상위 4위 등급)로 우량한 GS건설이 3200억원어치의 3년 만기 회사채를 발행하기 위해 기관투자자를 대상으로 수요 예측 조사를 했다. 금리를 3년 만기 국고채 금리(연 2.75%)보다 최대 0.73% 포인트 얹어 주겠다고 했는데, 700억원밖에 신청이 들어오지 않았다. 작년 9월 신용등급 A-였던 웅진홀딩스가 법정관리를 신청하는, 이른바 '웅진 사태' 이후 초우량 기업을 제외하고는 회사채 발행이 어려워진 탓이었다. 하지만 올해 1~2월 GS건설은 만기 5년 이상의 장기 CP(기업어음)를 8000억원 발행하는 데 성공, 회사채 시장에서 받았던 설움을 씻어냈다.

회사채 시장에서 초우량 기업들이 발행하는 회사채에만 수요가 몰리고 나머지는 소외되는 식으로 양극화가 심해지자 소외 그룹에 속한 기업들이 장기 CP, 담보부사채, 사모사채 등으로 자금조달 루트를 다양화하며 돌파구를 마련하고 있다.

올해 기업어음 발행 작년보다 30% 이상 증가

신용등급이 우량한 건설사와 A등급 이하 기업들이 주로 달려가는 시장은 장기 CP 시장이다. 장기 CP는 만기가 1년 이상인 기업어음을 말한다. CP는 회사채와 달리 수요 예측 등의 공모 절차를 밟을 필요가 없고 증권신고서도 제출할 필요가 없어 기업 입장에선 발행이 간편하다.

대우증권에 따르면 올 들어 3월 7일까지 장기 CP가 11조6102억원어치 발행됐다. 작년 같은 기간보다 32% 증가한 것이다. 특히 장기 CP를 발행한 기업 중 신용등급이 A급인 기업의 비중은 올해 72.2%로 작년의 62.5%보다 늘었다. 회사채 시장에서 외면받는 A등급 기업의 발행이 늘어난 것이다. A급 기업뿐 아니라 GS건설, 삼성물산, 대림산업 등 우량 건설사들도 장기 CP를 잇달아 발행하고 있다.

증권업계 관계자는 "발행사가 원하는 금리를 제시하고 '사고 싶으면 사라'는 식으로 공모하는 회사채 시장과 달리, CP는 브로커(증권사 직원)들이 '원하는 금리를 맞춰 주겠다'며 수요자를 찾아다니다 수요처를 찾았을 때 발행하는 것이어서 시장 성격이 다르다"며 "최근 CP 시장에 우정사업본부 등 연기금이 들어와 자금이 풍부해진 것도 장기 CP 물량이 쉽게 소화되는 이유"라고 말했다. 자산운용사에서 운용하는 MMF(머니마켓펀드)나 은행의 신탁 계정도 CP의 주요 고객이다.

투자자 입장에선 같은 금리라면 CP가 회사채보다 매력적이다. CP는 액면가를 할인해서 발행한다. 예컨대 만기 1년짜리 1억원 CP의 금리가 5%라면 9500만원에 발행해서는 1년 후에 1억원을 돌려주는 것이다. 투자자 입장에선 CP와 회사채의 금리가 5%로 같을 경우, 회사채엔 1억원을 투자해야 이자 500만원을 벌지만 CP는 9950만원만 투자해도 이자 50만원을 벌 수 있다.

하지만 CP는 발행이 간편한 만큼 부실기업도 쉽게 발행할 수 있어 투자자가 피해를 볼 위험성도 크다. 지난 2011년 LIG 건설이 법정관리를 신청하기 직전에 대규모로 CP를 발행한 게 그 사례다. 감독 당국은 5월부터는 만기 1년이 넘는 CP에 대해서 증권신고서를 제출하도록 하는 등 규제를 강화할 방침이다.

담보부사채는 3년 만에 재등장

신용등급이 BBB+인 동부팜한농, 동부메탈은 올해 들어 공장, 연구소 등을 담보로 해서 담보부사채를 발행해 2400억여원을 조달했다. 담보부사채는 부동산 등을 담보로 발행하기 때문에 투자자들이 일반 공모 회사채보다 상대적으로 안심하고 투자할 수 있다. 회사 입장에선 BBB등급 회사채는 연 5~6% 금리를 물어야 하지만 담보를 제공하면 금리를 연 4%대로 떨어뜨릴 수 있어 유리하다. 강수연 대우증권 연구원은 "담보부사채가 발행된 것은 2011년 이후 3년 만에 처음으로, 올 들어 3개 기업이 발행해 기관 투자자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기 때문에 앞으로 발행이 늘어날 수 있다"고 말했다.

사모사채도 공모 회사채 발행이 어려운 기업들의 새 자금 조달원으로 주목받고 있다. 사모사채는 은행, 증권사 등 소수의 투자자만 모아서 채권을 발행해 투자를 받는 것이다. 공모를 하면 수요 예측도 해야 하고 절차가 복잡하지만 사모는 상대적으로 절차가 단순하다. 대우증권에 따르면 올 들어 지난 7일까지 사모사채가 1조4424억원어치 발행됐는데, 이 중 A등급 이하와 중소업체의 발행량이 954억원에 달해, 작년 같은 기간에 비해 13배 수준으로 늘었다.

김영도 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장기CP나 사모사채 등의 시장은 공모를 거치는 회사채 시장보다는 불투명해서 투자자 보호가 취약하다"며 "투자자도 주의해야겠지만, 감독당국은 이들 시장의 투명성을 높이기 위해 공시를 강화하는 등 필요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말했다.

▲11일자 B3면 '일부 기업, 회사채 발행 어렵자 '이 없으면 잇몸'' 기사 중 '9950만원'은 '9500만원', '50만원'은 '500만원'으로 바로잡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