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4일 오전 11시8분. 기자가 탑승한 KTX열차는 서울 용산역을 출발한 지 2시간50분 만에 전남 곡성역에 도착했다. 곡성역은 역사를 빠져나가는 지하도나 고가가 없어서인지 전형적인 시골의 간이역처럼 작게 느껴졌다. 출구를 찾지 못해 어리둥절해 하는 일행에게 노신사가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서울서 오신 기자이시죠? 그냥 철로를 가로질러 빠져나가면 됩니다. 따라 오세요.” 마중을 나온 사람은 고현석(70) 전 곡성군수다.

전남 곡성군 죽곡면에 건설되고 있는 은퇴자 마을 ‘강빛마을’의 전경. photo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그의 안내를 받으며 철길을 건너 역사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다시 차량을 타고 15분 정도를 이동했다. ‘나의문화유산답사기’의 저자로 유명한 유홍준 명지대 교수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드라이브하기 좋은 코스로 꼽은 17번 국도를 타고 차가 달리기 시작했다. 기찻길 옆으로 유유히 흐르는 섬진강 물줄기가 그림 같은 풍광을 만들어 냈다. 차량은 18번 국도로 방향을 돌렸다. 18번 국도는 국내에서 가장 늦게 도로 포장이 이루어진 길이다. 그만큼 유동인구가 적은 한산한 곳을 관통하고 있다는 얘기다.

150가구가 목표
차량이 목적지에 도착하자 비슷한 모양을 한 109채의 새집들이 눈에 들어왔다. 차량을 타고 오며 길가에서 봤던 시골집과는 차원이 다른 현대식 2층 집들이 일정하게 지어져 제법 이색적이기까지 했다. 인적도 드문 곡성군 죽곡면 산자락에 현대식 건물로 이뤄진 새로운 마을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시골의 풍경을 바꿔놓고 있는 이 변화의 중심에는 은퇴자들이 있었다. 서울 등 도심에서 귀촌을 결심한 시니어그룹이다. 그들은 이곳에 자신들의 집단 부락을 짓고 인생 2막을 열고 있었다. 4월 중순에 완공될 이 마을은 마무리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일반 가정집은 대부분 완공된 상태였지만 마을 구성원들이 함께 공유하게 될 커뮤니티센터와 무지개광장 등은 완공까지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강빛마을의 산파인 고현석·김화중 부부. 이 부부가 사는 집은 마을에서 가장 후미진 곳에 있다. photo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이 놀라운 변화를 이끌고 있는 사람은 고현석 전 곡성군수다. 고 전 군수는 군수 재직 시절(1998~2006년) 시골 인구가 줄어드는 걸 막을 묘안을 찾다가 시니어마을을 구상하게 됐다고 말했다.

“2006년부터 구상을 해 온 ‘강빛마을’이 드디어 완공을 앞두고 있습니다. 지방의 공동화현상을 막고 고령화사회에 대비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생각하다가 은퇴자 마을을 만들게 됐습니다. 미국 등 선진국은 은퇴하면 시골에 가서 사는 게 일반화돼 있잖아요. 정부와 지자체의 예산지원을 받고 회원을 모으기까지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습니다. 곡성으로 은퇴자를 모시는 게 쉽지 않더군요.” 그는 이 마을의 촌장이다.

40대 이하도 30가구
'강빛마을'은 그 규모가 압도적이었다. 전남 곡성군 죽곡면 강빛마을길 10번지 일대에 들어선 이 마을은 총 109가구가 모여 사는 국내 최대 규모의 은퇴자 집단거주지다. 마을 전체 면적은 13만㎡(4만평) 정도다. 150가구까지 늘릴 방침이다. 곡성 인구가 총 3만2000명 선인데, 이 마을이 완공되면 최소한 200여명의 곡성 군민이 새로 태어난다. 은퇴자들의 가족과 이곳을 찾게 될 민박객까지 합치면 유동인구는 200명의 몇 배 이상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강빛마을에 입주했거나 조만간 입주하게 될 주민은 50~60대 이상 은퇴자들이 다수를 차지한다. 직업별로는 대학교수, 초·중·고교 교원, 공무원 등이 많다고 한다. 연금 혜택을 받는 안정적인 은퇴자들이 중심이 되고 있었다. 시니어마을임에도 불구하고 40대 이하의 세대주도 30가구가량 된다고 했다. 귀촌을 결심하고 마을에 입주하게 될 40대 이하 세대주들은 시니어마을 운영에 참여할 주요 일꾼들이다. 고 전 군수는 "시니어마을에 나이 든 사람만 있는 건 아니다. 시니어를 돌보고 마을 관련 사업을 맡을 젊은 사람들이 함께 살아야 한다. 초기 회원 모집의 어려움을 해결하려다보니까 40대 이하 가구가 예상보다 많아졌다"고 말했다.

우리 사회에서 중년 이후에는 남성보다 여성이 시골생활에 거부감을 나타내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곤 한다. 도심 아파트의 편리한 삶에 적응된 주부들은 시골생활을 불편하게 생각하고 꺼리게 마련이다. 고 전 군수도 처음 입주자를 모집할 때 주부들의 반대로 어려움을 겪었다고 말했다. "서울 사는 제 친구들에게 강빛마을에 내려와 함께 살자고 제안하면 모두 좋다며 박수를 칩니다. 그러나 그날 밤 집에 가서 부인과 얘기를 나누면 대부분 없던 일이 돼 버려요. 부인들이 시골 생활에 반대를 많이 하거든요. 그것도 모르고 시골로  당장 내려갈 것처럼 호기를 부린 친구들은 민망해서인지 연락도 잘 못합니다."

전남 곡성은 은퇴자가 살기에 적합한 지역으로 평가된다. 은퇴자들이 별장을 많이 짓는 강원도에 비해 전남 곡성은 기온이 높고 오염원도 적다. 주변에 공장이 거의 없어 마을 뒷산과 강가에서 꿩과 같은 산짐승을 쉽게 만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남해와 서해가 가까워 해산물도 풍부하다. 곡성에서 가장 유명한 먹거리는 섬진강변에서 잡아 올린 참게 요리다.

소득창출이 가능하다
강빛마을이 주목받는 것은 그 규모가 크기 때문만은 아니다. 시니어마을로서 강빛마을만이 가진 독특한 마을 운영 프로그램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이와 관련한 아이디어는 고 전 군수의 부인이자, 강빛마을 운영을 책임지고 있는 김화중(68) 전 보건복지부 장관에게서 나왔다. 김 전 장관은 강빛마을 사업권자로 등록된 (주)리버밸리의 대표를 맡고 있다.
우선 민박을 통한 소득창출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은퇴자에게 있어서 소득은 매우 중요한 문제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리버밸리 김화중 대표는 모든 가구가 민박이 가능하도록 건물을 설계했다. 강빛마을 109가구는 33㎡(10평)가량의 2층 공간을 민박용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한 가구당 건면적은 총 99㎡(30평) 규모로 동일하게 지어졌는데, 1층 66㎡(20평)와 2층 33㎡로 나누어진다. 1층은 은퇴자 내외가 살고 2층은 민박을 준다. 강빛마을 109가구 가운데 84가구 이상이 민박을 하겠다는 동의서를 강빛마을 운영을 맡은 (주)리버밸리에 제출했다. 민박 비용은 1일 10만원 안팎으로 책정될 예정이다. 아침과 저녁은 마을 주민들이 무지개광장에 마련된 식당에 모여 공동으로 준비하는데, 민박하는 사람들도 이 식당을 이용할 수 있다.

강빛마을이 들어선 곡성군 죽곡면은 대황강(옛 보성강)이 흘러 겨울철을 제외하면 항상 관광객이 많이 몰리는 지역이다. 강에서 카누 등 각종 스포츠를 즐길 수 있다. 드라이브 코스로도 제법 이름이 나 있는 곳이다.

리버밸리 김화중 대표의 설명이다. "은퇴자는 5가지가 부족해집니다. 직업, 소득, 성취욕, 건강, 친구 등이 없어지거나 크게 줄어들게 마련이죠. 강빛마을은 은퇴자가 잃은 걸 다시 채워주겠다는 목표를 정하고 출발했습니다. 일자리를 만들고 소득을 얻을 수 있도록 하는 게 고령화사회를 해결하는 열쇠라고 생각합니다. 외국의 BNB(Bed & Breakfast)와 같은 개념의 민박을 우리의 주된 사업으로 염두해 두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성취욕도 생기고 마을 주민 간에 대화도 늘 수밖에 없죠."

강빛마을 회원 109명은 각각 1억9500만원씩을 투자했다. 이 투자금으로 개인당 한 채의 집을 포함, 텃밭으로 쓸 수 있는 330㎡의 땅을 소유하게 된다. 서울에 아파트를 소유하고 있는 은퇴자의 경우 전세금만으로도 강빛마을에 입주가 가능하다. 집을 처분해서 내려올
경우 안정적인 정주가 가능할 것으로 예상된다. 은퇴자 개인이 낸 투자금과는 별개로 정부와 지자체에서도 약 40억원가량을 강빛마을에 지원했다. 은퇴자 마을이 100가구 이상 규모로 추진되면 정부가 이를 장려하는 차원에서 지원금을 지급하고 있다. 강빛마을은 이 지원금으로 커뮤니티센터와 무지개광장, 식당 등 부속건물을 짓고 있다.

김화중 대표는 "개인당 2억원가량을 투자했기 때문에 연간 10%의 수익은 가져갈 수 있도록 하자는 게 내 생각"이라며 "연간 2000만원 정도는 벌 수 있도록 해야 우리 마을이 제대로 정착할 수 있다. 마을 주민들이 모두 일을 하고 결실을 나누게 된다"고 말했다.

이밖에도 리버밸리 측은 교육사업, 출판사업 등의 부대사업을 추진할 계획이다. 은퇴한 주민들이 가진 전문성을 살려 강의를 하거나 취미활동을 배우는 프로그램도 마련할 예정이다. 또 전통주 사업을 한다. 전남 구례에서 구입한 우리밀로 누룩을 만들고 친환경 쌀을 이용해 이미 '명품 막걸리'를 출시했다. '명당명주7'으로 이름 붙인 이 막걸리는 강빛마을을 찾는 일반인들에게 판매한다.

'100세 건강 플랜'에 맞춰
커뮤니티센터와 무지개광장 주변 건물에는 3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세미나룸 2개와 50명 규모의 소회의실 9개도 갖추고 있다. 음향기기가 설치된 300석 규모의 야외 공연장도 만들고 있다. 기업이나 단체 회원 수백 명이 방문해도 충분히 수용 가능한 설비를 갖추게 된다.

강빛마을은 '100세 건강 플랜'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서울대 강남검진센터에서 연 1회 정기검진을 받고 그 결과에 따라 체계적인 건강 관리를 받을 수 있는 프로그램을 운영할 계획이다. 서울대병원과 강빛마을 인근 보건지소가 정보를 교류해 주민들의 개별 건강상태에 적합한 처방을 하는 방식이다.

기자가 방문한 날, 강빛마을에는 서병찬씨 부부, 고현석 전 군수 부부 등 총 11가구가 입주를 마친 상태였다. 지난해 10월 처음으로 강빛마을에 이사를 온 서병찬씨 부부는 이곳 생활에 만족해했다. 30년 공직생활을 마감한 서씨는 강빛마을로 이사를 오기 위해 아내
정순덕씨를 몇 달간 설득했다고 한다. 정순덕씨의 집은 1층이 침실과 거실로 꾸며져 있고 2층은 서울에서 자녀들이 내려올 경우 사용하는 공간으로 쓸 예정이다. 정순덕씨는 "남편이 원해서 이사를 왔는데 요새는 적응을 해서 아주 편하다. 매일 소나무 숲으로 산책을 하는 게 일상이 됐다. 주말에 교회에 가기 위해 광주로 나갈 때 대형마트에 들러 필요한 물건을 사온다"고 말했다. 이미 강빛마을에 짐을 푼 거주자들은 향후 커뮤니티센터에서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함께 식사할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이웃 간에 정을 나누고 고령이 된 주부들의 일손을 덜어주는 훈훈한 마을이 완성되는 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리버밸리 측은 "입주민들이 상부상조하면서 나이 든 세대를 돌보는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설명했다.

강빛마을보다 앞서 은퇴자마을을 추진한 사례는 있지만 대부분 실패했다. 규모가 작았고 강빛마을처럼 소득을 창출하는 프로그램을 준비하지 않아 단순히 노후를 보내는 거처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 더 많은 기사는 3월11일 배포되는 주간조선 2247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