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차 그룹은 2012년 투자 계획을 2011년 12월 30일 발표했다. 하지만 올해 투자 계획에 대해서는 해를 넘겨 두 달이 다 돼 가는데도 "아직 최종적으로 결정하지 못했다"며 발표를 미루고 있다. 해마다 공격적인 투자를 주도해 왔던 삼성그룹도 감감무소식이다. 지난해 1월 17일 47조8000억원이라는 사상 최대 투자 계획을 밝혔지만, 올해는 설을 넘기도록 투자 계획을 내놓지 않고 있다.

새해 들어 두 달 가까이 지났지만 국내 주요 대기업들이 투자 계획 발표를 주저하는 기(奇)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수만 개에 이르는 협력업체들도 갈피를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중이다. 신년이 되면 대기업들이 경쟁하듯 '사상 최대 규모 투자'를 강조하며 투자 분위기를 주도하고 중소 협력업체들이 이에 맞춰 움직였던 예년과 비교할 때 완연히 달라진 분위기다.

19일 투자 계획을 발표한 CJ를 포함해 20대 그룹 중 올해 투자 계획을 밝힌 곳은 LG·SK·포스코 등 4곳에 불과하다. 이 중 LG와 CJ만 각각 20조, 3조2400억원으로 사상 최대 투자 계획을 밝혔고, SK와 포스코는 작년 연초 발표한 것보다 투자 목표를 축소했다.

경기 전망의 불투명이 주요 원인

투자 발표를 미루는 이유는 복합적이다. 가장 먼저 꼽는 요인은 불투명한 경기 전망이다. 대한상공회의소가 국내 기업 500개사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응답 기업의 59.6%가 올해 경제성장률을 '2% 이하'로 전망했다. 대다수가 올해 성장률이 작년(2.0%)만도 못하다고 본 것이다. 한국은행(2.8%), 정부·KDI(3.0%), 국제통화기금(3.2%) 등 국내외 기관이 내놓은 전망에 비해 훨씬 어둡다.

국내 경제의 저성장 기조가 언제까지 이어질 것으로 보느냐는 질문에 '향후 3년 이상'(63.8%)이라는 답변이 '2년 내 저성장 탈피'(36.2%)라는 응답을 크게 웃돌았다. 경기 전망이 비관적이다 보니 탄력적으로 투자를 집행하겠다는 곳도 늘고 있다. 지난해 사상 최대 실적을 기록한 삼성전자는 "반도체·디스플레이 등에 대해 작년 수준의 투자 규모는 유지하되 업황에 따라 탄력적으로 운용하겠다"는 입장만 표명한 상황이다.

불분명한 신성장 정책

경기 전망이 나쁘다는 이유로 투자 부진이 모두 설명되지 않는다. 산업계에서는 조(兆) 단위로 투자할 만한 신성장 산업이 없는 것이 투자 빈곤을 만든 결정적인 요인이라고 지적한다. 4대 그룹의 한 임원은 "반도체·디스플레이·석유화학·철강 등 기존 산업 외에 새롭게 돈을 투입할 만한 신성장 산업을 찾지 못해 고민"이라고 말했다. 과거엔 정부가 강력한 산업 진흥 정책으로 투자를 이끌었다. 이명박 정부가 각종 세제 혜택 등을 유인책으로 추진한 '녹색 성장 드라이브'가 대표적인 예다. 이런 정책 지원을 업고 주요 기업들은 태양광·풍력·2차전지(충전할 수 있는 배터리) 등에 대한 투자 붐이 일었다. 태양광의 경우 삼성·SK·LG·현대중공업·한화 등 10대 그룹 중 5곳에서, 2차전지는 7곳에서 사업을 벌였다. 그 결과 태양광 산업은 글로벌 업황이 붕괴하면서 큰 손해를 봤지만, 2차전지 산업은 세계적 수준으로 올라섰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의 산업 정책 밑그림은 아직 불명확하기 때문에 기업들이 투자를 주저하는 요인으로 꼽힌다. 대기업 계열 경제연구소 연구원은 "박근혜 정부는 IT융합 산업을 뜻하는 '스마트 컨버전스' 정도를 빼곤 신성장 동력에 대한 구체적인 정책 의지를 내보이지 않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국가 연구개발(R&D) 정책을 주관하는 미래창조과학부가 출범하더라도 4~5월은 돼야 신성장 산업에 대한 종합계획안을 내놓을 것으로 보인다.

투자 부진은 중소기업으로 불똥

대기업이 투자 계획 확정을 미루거나 규모를 축소한 것은 수만 개의 협력업체로 그 여파가 미칠 수밖에 없다. 1·2·3차 협력업체들도 덩달아 투자 계획을 못 잡고 있다는 얘기다.

수도권의 한 반도체 장비업체 사장은 "요즘 전 세계에서 LCD 설비 투자를 가장 크게 집행하는 곳은 한국 기업이 아니라 중국 BOE 같은 곳"이라며 "국내 대기업이 대규모로 설비 투자 발주를 하던 시대가 끝난 게 아닌지 의심스럽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