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대 게임전시회인 ‘지스타’가 열리던 지난 11월 9일 부산 벡스코. 지스타 조직위원회 관계자들이 갑자기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당시 전국을 돌면서 대선 유세 중이던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가 지스타 현장을 방문하기로 했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박 후보는 오후 2시 정도에 벡스코에 도착해 게임기업 채용박람회, 기업관(B2B 전시장), 소비자관(B2C 전시장)을 차례로 방문했다. 박 후보는 “게임 산업은 잠재력이 큰 산업”이라며 “게임이 문화사업의 성장동력이라고 생각하고 앞으로 지속적으로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치열한 접전을 벌이던 제18대 대통령 선거가 박근혜 당선인의 승리로 끝났다. 정보통신기술(ICT) 업계는 대선이 끝나자마자 박 당선인의 ICT 정책을 분석하기에 바쁘다.

◆ 통신업계는 긴장

통신비 인하는 박 당선인과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가 모두 공약했다. 하지만 구체적인 실행 방법에서 차이가 있다. 박 당선인은 이동통신 가입비를 없애고, 방송통신위원회의 요금인가 심의과정을 공개하겠다고 밝혔다. 가입비 폐지는 실적에 직격탄이 되고, 요금인가 심의과정 공개는 통신비 인하의 빌미가 될 수 있기 때문에 통신업계로서는 둘 다 껄끄러운 주제다.

통신업계는 지난 9월 서울행정법원이 방통위의 요금 원가 자료를 공개하라고 판결하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요금 원가 자료에는 경쟁사에 공개되면 안 되는 민감한 영업자료들이 포함돼 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들은 통신사들이 적정 수준보다 요금을 높게 설정한 것이 드러날까 두려워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현재 SK텔레콤과 방통위는 행정법원 판결에 대해 항소한 상태다.

박 당선인이 공약한 요금인가 과정 공개가 실현되면 통신사들의 민감한 영업자료들이 그대로 노출되는 셈이다. 통신업계 관계자는 “민감한 영업자료를 경쟁사도 볼 게 뻔한데 고스란히 공개하라는 건 말이 안 된다”며 “요금 인가과정 공개가 어떤 식으로 실현될지는 미정이지만 과도한 기업 정보 유출은 막아야 한다”고 말했다.

제조사 단말기 판매 장려금을 정부가 직접 조사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들겠다는 공약도 통신업계 입장에서는 쉽게 볼 수 없다. 고가의 스마트폰 위주로 국내 통신시장이 짜인 상황에서 제조사 단말기 판매 장려금이 줄거나 없어지면 통신 업황 자체가 타격을 입을 가능성이 크다.

다만 이동통신 가입비 폐지나 요금 원가 자료 공개가 쉽지는 않을 전망이다. 통신사 입장에서는 일방적인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데, 통신사의 손해를 보전해줄 대안도 마땅치 않다. 오승훈 대신증권 애널리스트는 “공약대로 가입비를 폐지하면 연간 5000억원의 수익이 감소할 것이다. 기본료 인하까지 합치면 연간 6000억원의 수익이 감소하는 셈”이라고 말했다.

◆ ICT 정책 목표는 일자리 창출

박 당선인은 일자리 문제와 ICT 산업 활성화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기 위해 스마트 뉴딜 카드를 꺼내 들었다. 스마트 뉴딜은 ICT 기술을 농어업이나 제조업, 서비스업 등 다른 사업에 적용해 부가가치를 높이겠다는 전략이다. 여러 산업이 활성화되면서 일자리까지 늘려 청년 실업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이다.

ICT 업계는 스마트 뉴딜과 함께 박 당선인의 콘텐츠 정책에도 기대를 걸고 있다. 박 당선인이 제시한 콘텐츠 산업 공약은 ‘콘텐츠 코리아 랩’과 ‘글로벌 콘텐츠 지원센터’ 설립이다. 콘텐츠 관련 사업 아이디어를 실제 창업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하는 데 정책의 초점이 맞춰져 있다. 창업을 통한 일자리 창출이 기본적인 목표다. 콘텐츠 산업 활성화 차원에서 방송관련 법·제도 정비도 함께 추진한다. 유료방송 법체계를 일원화하고, 방송법, IPTV법, 통신관련법 체계도 통합한다.

박 당선인의 ICT 정책에 대해 업계에서는 기대와 우려가 교차하고 있다. ICT 산업 성장 의지를 밝혔지만, 구체적인 방안은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 세계를 강타한 경제위기가 내년에 더욱 심해지면 정부가 대기업 위주의 정책을 펼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남민우 벤처기업협회 회장은 “우리 경제의 지속성장과 고용창출에 큰 몫을 담당해 온 벤처업계도 앞으로 더욱 성장하기 위해서는 정책 배려가 필요하다”며 “중소 벤처기업과 대기업의 역량이 결합하는 건전한 협업 생태계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창업 활성화 같은 박 당선인 ICT 정책이 이번 정부의 창업 대책과 별 차이가 없다는 지적도 있다. 이명박 정부에서도 중소기업 동반성장 지원과 창업 활성화 대책이 여러 차례에 걸쳐 나왔다. 하지만 벤처 창업에 필수적인 생태계 조성에는 실패했다는 지적을 받는다. 한 벤처기업 대표는 “미국 실리콘 밸리가 한국 벤처업계와 가장 다른 점은 아무리 실패해도 재기할 수 있게 도와주는 분위기”라며 “정부의 벤처 정책이 창업을 많이 유도하는데 집중돼 있는데, 창업이 실패한 다음 실패를 바탕으로 재기할 수 있도록 돕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말했다.

창업 생태계가 꾸준히 성장하기 위해서는 정부 내에 전담 조직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있다. 현재 지식경제부, 중소기업청, 방송통신위원회 등이 분담하는 중소기업, 벤처 창업 정책을 총괄하는 조직을 따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 일부 산업은 규제 강화 움직임도

게임업계는 게임 셧다운제 확대 가능성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게임 셧다운제는 만 16세 미만 청소년은 밤 12시부터 다음 날 오전 6시까지 온라인 게임에 접속하지 못하도록 한 법이다. 산업 위축과 실효성 부족을 근거로 게임업계가 강하게 반발했지만, 정부는 모바일 게임으로 셧다운제를 확대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박 당선인은 게임 셧다운제 모바일 확대에 대해 “청소년의 게임 중독을 막기 위해 찬성한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모바일 게임 셧다운제 우려로 20일 하루 동안 모바일 게임업체들의 주가는 급락했다. 컴투스(078340)가 전일대비 12.15% 하락했고, 게임빌도 14.08% 하락했다. 모바일 게임업계 관계자는 “게임 셧다운제는 청소년의 게임 이용을 줄이지도 못하고, 산업에 부담만 준다는 사실이 이미 밝혀졌다”며 “게임 업계 차원에서 이번 정부에서 만들어졌던 부당한 규제를 철폐할 수 있도록 요청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콘텐츠 산업 강화를 주장하면서 게임 산업에는 규제를 늘리는 것은 모순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게임산업은 국내 콘텐츠산업의 수출액 가운데 60%를 차지할 정도로 비중이 크다.

결국 박 당선인이 이런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콘텐츠 정책을 다른 ICT 정책과 함께 다뤄야 한다는 분석이 힘을 얻고 있다. 지금처럼 콘텐츠 정책을 문화부나 여성가족부가 다루게 되면 규제 부처가 늘어나기 때문에 산업은 위축될 수밖에 없다. 김성철 고려대 교수는 차기정부 ICT 정부 조직 개편에 대한 토론회에서 “지식경제부의 소프트웨어 산업진흥기능 및 문화체육관광부의 콘텐츠 규제 진흥기능을 이관해 분산된 ICT 기능을 통합할 수 있는 정보방송통신부를 신설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