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1월부터 단계적으로 적용할 예정이었던 은행 유동성 규제방안인 '바젤Ⅲ' 도입이 전격 연기됐다. 유럽에 이어 미국까지 바젤Ⅲ 규제 도입을 유보하기로 한 상황에서 우리나라가 먼저 도입하면 실물경제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금융위원회는 지난 18일 기획재정부·한국은행·금융감독원과 실무자회의를 갖고 바젤Ⅲ의 국내 적용 시기를 잠정 연기하기로 했다고 21일 밝혔다. 시행시기와 방법은 내년에 다시 검토한다. 금융위 관계자는 "바젤은행감독위원회(BCBS) 회원국 27개 중 미국ㆍEU 등 16개 국가가 규제안을 확정하지 않았고 내년 초 시행이 어려운 국가도 상당수 있다"며 "도입은 하되 적용시기는 해외 주요국가의 동향을 보고 나중에 결정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금융위는 지난 9월 바젤Ⅲ를 도입하는 내용으로 은행업 감독규정과 시행세칙 규정 변경을 예고했다. 이어 규제개혁위원회 심사를 거쳐 오는 26일 정례회의에서 내년에 바젤Ⅲ를 도입하는 안을 확정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최근 유럽, 미국이 바젤Ⅲ 도입을 유보하기로 하면서 우리나라만 앞서갈 필요가 없다는 인식이 확산됐고 도입을 연기하기로 했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내년에도 경기가 어려울 것으로 보이는데 은행권의 자본 규제를 강화하면 대출 축소 등으로 실물경제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며 "선진국보다 서둘러 가야 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미국 금융감독당국은 지난달 초 "은행권이 준비되지 않았다"며 내년으로 예정됐던 자기자본 규제 시행 일정을 무기한 연기했다. 유럽연합(EU)은 유럽의회에서 규제안에 대한 최종합의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논의된 바젤Ⅲ는 자본의 질과 투명성을 높이고 완충 자본을 도입해 위기 시 발생할 충격을 흡수할 수 있게 한 제도다. 바젤Ⅲ가 도입되면 국내 은행들은 현행 8%인 국제결제은행(BIS) 자기자본 비율을 단계적으로 올려 2019년부터 10.5%를 충족해야 하고 은행과 은행지주회사들은 보통주자본 비율 7%, 기본자본 비율 8.5%도 맞춰야 한다. 따라서 바젤Ⅲ가 도입되면 은행들은 부실 대출을 줄이기 위해 대출을 까다롭게 할 가능성이 커진다.

또 바젤Ⅲ는 은행의 국공채 등 고유동성자산을 순 현금 유출액으로 나눈 유동성커버리지비율(LCR)이 100% 이상이어야 한다고 못박고 있다. 국내 은행의 평균 LCR은 지난 3월 말 기준 100%를 조금 웃돌지만 은행들은 이 비율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게 쉽지 않다는 입장이다. LCR을 높이기 위해서는 내년에 은행별로 국공채를 1조원가량 매입해야 한다. 국내 은행들은 은행채로 비싸게 돈을 조달해 국공채를 사면 손해가 발생한다며 바젤Ⅲ 도입을 반대해 왔다.

바젤Ⅲ 도입이 연기되면서 은행들은 한숨 돌리게 됐지만 바젤Ⅲ 도입 관련 합의를 G20(주요 20개국) 서울 정상회의에서 이끌어 냈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대외적인 신뢰도가 타격을 입을 것이란 시각도 있다. 금융권 관계자는 "미국, 유럽을 제외한 아시아 국가들은 내년 1월부터 바젤Ⅲ를 도입하는데 G20 의장국이었던 우리나라가 도입을 연기하면 신뢰도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