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하도급업체)이 개발한 모든 개발물의 지적재산권은 갑(대기업)이 갖는다. 개발물에 을이 이미 보유한 지적재산권이 포함된 경우, 이 역시 갑에게 양도한다."

국내 한 대기업 계열의 IT업체가 자사에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중소 소프트웨어(SW) 업체와 맺은 하도급계약서의 일부다. 이처럼 대기업이 프로젝트를 주면서 하도급업체의 기술과 인력을 공공연히 탈취하는 것이 국내 업계 관행이었다.

한 중소업체 대표는 "모두들 소프트웨어가 중요하다고 하지만, 정작 현장에선 대기업의 횡포 때문에 도저히 경쟁력을 키울 수 없다"고 말했다.

국내 SW산업 시장 규모는 26조원 수준. 하지만 매출이 10억원도 안 되는 영세업체가 전체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50억원 이하 업체까지 합하면 전체 산업의 85%에 달한다.

대기업이 큰 프로젝트를 따서 중소업체에 하도급을 넘기고 이것이 2차, 3차로 계속 이어지는 구조다. 이 과정에서 대·중소기업 간에 불공정한 하도급 거래가 공공연하게 이뤄져 왔다.

전문가들은 "국산 SW산업을 살리려면 다수의 영세업체가 소수의 대기업을 떠받치는 일방적 구조부터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제일 시급한 것이 영세업체의 지적재산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보시스템 분야의 경우, 개발물의 소유권을 대기업에 넘기더라도 하도급업체에서 자체적으로 영업을 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이다.

'납품가 후려치기' 관행과 '인력 빼가기'도 영세업체들이 지속적으로 개선을 요구하는 사안이다. 대기업들이 주로 쓰는 수법은 과업량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개발기간을 단축시켜 대금을 깎는 것. 하도급업체 입장에선 빠듯한 납기일을 맞추기 위해 철야작업까지 하고도, 오히려 돈을 적게 받아왔다.

중소 SW업체 관계자는 "그간 대기업에서 이메일이나 전화를 통해 출퇴근시간은 물론 주말 휴무 여부까지 지정해주는 경우가 많았다"고 말했다. 대기업들이 중소기업에 제대로 된 계약서도 주지 않고 소프트웨어 개발에 먼저 착수하도록 하는 '선개발 후계약' 관행도 주된 문제점으로 지적됐다.

이 같은 불공정한 관행을 근절하기 위해 공정거래위원회(공정위)가 나섰다. 7일 표준 하도급계약서를 전면 개정·보급한 것이다. 공정위가 새로 만든 계약서에는 중소 SW업체들의 요구사항이 다수 담겼다. 먼저 공정위는 과업량이 바뀌지 않는 한 대금을 깎는 것을 금지하고, 고무줄처럼 늘어났던 무상하자보수 기간도 '1년 이하'로 명문화했다. 하도급업체에 마음대로 떠넘겼던 검수비용·교육비용도 원칙적으로 원사업자가 부담하도록 규정했다.

또한 대기업이 하도급 계약을 맺은 업체 인력에 직접적으로 업무지시를 할 수 없도록 했다. 만일 원사업자가 직접 지시를 하다가 과로사와 같은 사고가 발생할 경우에는 모든 책임을 원사업자가 지도록 했다. 공정위 관계자는 "계약서를 가장 먼저 손본 것은 하도급계약서가 불공정 거래가 시작되는 첫 단추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업계는 공정위 시도를 환영하면서도 대기업들이 얼마나 실천 의지를 가질지는 의문을 표시했다. 한 SW 업체 대표는 "부당한 SW 거래계약을 감시하고 그 실적을 대기업의 동반성장 평가에 반영하거나, 공공사업 발주시 중소업체에 인센티브를 부여하는 방안 등이 추가로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