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송을 처음 시작할 때는 최소한 분양가를 할인받을 수 있고 무조건 승소한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오히려 연체이자만 쌓이게 됐습니다. 변호사는 항소하라고 하는데 똑같은 실수를 두 번 하기 싫어서 그만두기로 했습니다."
지난해 7월 건설사와 중도금 대출 은행을 상대로 계약해제 소송과 채무부존재 확인소송(분양계약 무효를 전제로 중도금 대출 채무가 없다는 확인을 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던 경기도 김포시의 A 아파트 계약자는 지난 8월 말 1심에서 패소한 뒤 변호사의 말에 따라 제기했던 항소를 최근 취하했다. 2심에서 승소해도 대법원까지 가야 하는 데다 결과도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패소하면 그동안 미뤄왔던 중도금·잔금에 붙는 연 15~20% 안팎의 높은 연체이자만 더 불어난다.
부동산 경기침체 장기화로 지난해 하반기부터 수도권 외곽 지역에서 줄을 이었던 아파트 입주 전 계약해제 소송과 채무부존재 확인소송이 잇따라 패소 판정을 받자 소송을 취하하는 아파트 계약자들이 늘고 있다. 김포시 A 아파트 단지는 지난해 7월 540여명이 소송을 제기했지만 1심에서 패소하자 항소 인원이 당초의 24% 수준인 128명으로 줄었다. 항소를 포기한 계약자들은 연체이자 등을 납부하고 입주 절차를 진행 중이다.
◆ "채무부존재 실익 없다"…소송 취하 줄 이어
아파트 집단대출 관련 소송을 벌이고 있는 인천 영종도의 B 아파트 단지도 비슷한 상황이다. 총 1680가구 중 760가구 정도가 계약해제와 채무부존재 확인소송에 참여했었는데, 이 중 150가구 정도가 소송을 취하하고 입주를 준비하고 있다. 채무부존재 확인소송의 폐해가 현실로 드러나고 승소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점을 계약자들이 알았기 때문이다.
이 단지 시공사는 소를 취하하고 입주를 준비 중인 계약자를 지원하기 위해 분양가 2억4000만~2억5000만원의 약 8%인 2000만원을 할인해줄 계획이다. 시공사 관계자는 "제3 연륙교 등 기반시설 부재로 인한 계약자들의 고통을 분담하기 위해 이미 입주한 세대와 소송을 취하한 세대에 대출이자와 교통비, 입주 청소 등을 지원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소송을 진행하는 세대는 지원 대상에서 제외했다.
경기도 파주의 C 아파트 단지도 채무부존재 확인소송을 진행하던 계약자 중 약 120명이 소 취하를 전제로 연체이자 감면 등을 은행 측에 요구하고 있다. 해당 은행 관계자는 "연체이자를 감면해주면 도덕적 해이 문제가 발생하고 '소송을 하면 혜택을 준다'는 잘못된 인식을 줄 수 있어 신중하게 검토 중이다"고 말했다.
채무부존재 확인소송을 진행하다가 취하하거나 신규로 소송을 진행하는 곳이 줄면서 그동안 고공행진하던 시중은행의 중도금 대출 연체율이 지난 9월 올 들어 처음으로 꺾였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1.18%에서 지난 8월 1.9%까지 8개월 연속 가파르게 오르던 집단대출 연체율은 9월 1.8%로 둔화됐다.
금감원 관계자는 "9월말 중도금 대출 연체율이 줄어든 것은 은행들이 분기 말에 부실자산을 일시에 정리하는 '분기 말 효과' 영향이 크다"며 "최근에 집단 소송과 관련한 분쟁이 현저하게 줄고 있지만 추세를 확인하려면 조금 더 지켜봐야 한다"고 말했다. 금감원에 따르면 4월말 현재 28개 사업장에서 4190명이 채무부존재 확인소송을 진행 중이다. 금감원은 이달 중 소송 현황을 업데이트해 발표할 예정이다.
◆ "소송 때문에 피해"…계약자가 변호사 상대 소송 검토
계약해제를 전제로 한 채무부존재 확인소송은 승소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이 법조계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김포시 A 아파트 외에 경기도 용인의 D 아파트, 남양주시의 E 아파트, 고양시의 F 아파트도 최근 채무부존재 확인소송에서 입주 예정자들이 패소했다.
소송을 제기하는 계약자들은 분양계약이 해제되면 시행사가 계약자에게 받은 계약금과 중도금을 은행에 반환하기 때문에 은행에 따로 중도금을 갚을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법원은 대출약정에 따른 채무자는 아파트 계약자이고 분양계약이 소멸해도 아파트 계약자의 중도금 대출 상환 의무가 소멸하는 것으로 보기 어렵다고 명시했다.
채무부존재 확인소송에서 입주 예정자들이 잇따라 패소하자 일부 단지에서는 입주 예정자들이 소송을 이끌었던 변호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는 방안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경기도의 한 아파트 계약자는 "승소 가능성이 희박한데도 중도금 만기 연장을 거부하게 해 금전적인 손해를 봤다"며 "법적인 대응을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채무부존재 확인소송에서 입주 예정자들이 잇따라 패소하고 소송을 취하하는 단지도 나오고 있지만 일부 계약자들은 여전히 강경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인천 영종도의 B 아파트 협의회관계자는 "영종도에서 분양한 아파트는 분양대금에 제3 연륙교 건설 비용이 포함돼 있는데 연륙교는 아직 착공도 안 하고 있다"며 "어차피 입주를 못 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신용불량자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채무부존재 확인소송을 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채무부존재 확인소송을 진행하면 소송 기간에 중도금·잔금을 내지 않아도 신용불량자 등재가 보류된다. 그러나 패소 시 연체를 시작했던 날로 소급해 연체이자 등을 물어야 한다.
이 아파트 단지는 중도금 대출 만기가 다음 달까지 남아 있어 아직 연체이자를 낼 상황은 아니다. 그러나 입주 기간이 끝났는데도 중도금 대출 만기 연장을 거부하고 대금을 납부하지 않으면 분양가의 60%인 약 1억4000만원에 대해 연체이자만 매월 100만원가량 부과된다.
중도금을 대출해준 은행들은 지금까지 소송을 취하하고 입주한 계약자에겐 연체이자를 50%가량 감면해줬지만 더는 어렵다는 입장이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초창기에는 소송의 위험을 모르고 참여한 사람이 많아 연체이자를 감면해줬는데 그동안 소송의 위험성에 대해 여러 차례 설명했기 때문에 혜택을 더 주면 자칫 소송을 부추기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며 "끝까지 소송을 진행하는 사람 중에는 단기 차익을 노리고 5~6채씩 분양받아 어차피 입주가 불가능한 사람도 포함돼 있기 때문에 안타깝지만 원칙대로 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