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레마

가전제품을 만들어 파는 K사의 나 사장. 고객을 최우선 목표로 삼고 경영을 해 왔다고 자부한다. 그런데 작년 한 신문사에서 실시한 소비자 만족도 조사에서 터무니없이 낮은 점수가 나왔다. 충격을 받은 나 사장은 친절 교육을 강화하고, 서비스센터를 늘리고, 제품도 더 쓰기 편리하게 만들라고 지시했다. 1년이 지난 올해는 소비자 만족도가 훨씬 높아질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올해 똑같은 설문조사에서 순위가 조금도 올라가지 않은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해법

마치 짝사랑에 빠진 소년처럼 기업은 애타게 '고객 중심 경영'을 부르짖는다. 하지만 대부분의 짝사랑이 그러하듯 결과가 좋은 경우는 드물다. 컨설팅회사 베인앤컴퍼니가 362개 기업 임원들을 대상으로 '고객 중심 경영을 하고 있습니까?'라고 질문한 결과 기업의 95%가 '그렇다'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같은 조사에서 소비자들이 '제품이나 서비스가 만족스러운 수준'이라고 대답한 비율은 고작 8%에 불과했다. 한마디로 조사 대상인 대부분의 기업들이 위의 나 사장과 같은 상황을 겪고 있는 것이다. 왜 이렇게 고객은 기업의 마음을 몰라주는 걸까? 그것은 기업이 고객 입장이 되지 못하고 기업의 시선에서만 고객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기업들이 고객을 짝사랑하면서 가장 빈번하게 저지르는 실수 세 가지가 무엇일까?

◇섣부른 예측은 금물

고객 짝사랑의 첫 번째 실수는 고객의 말 속에 들어 있는 진심을 알지 못한 채 어떤 것을 좋아할 것이라고 섣부르게 예측하는 것이다.

2004년, 웰빙 열풍이 불어오자 패스트푸드 업계에는 찬바람이 불었다. 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맥도날드는 웰빙 메뉴를 출시할 것을 고려했다. 사전 설문조사를 실시해 보니 많은 사람들이 웰빙 메뉴를 사 먹겠다고 대답했다. 이 조사를 통해 맥도날드는 웰빙 메뉴를 출시하면 큰 인기를 끌 수 있을 것이라 믿었고, 샐러드와 호박 햄버거 등을 대대적으로 출시했다. 그런데 결과는 처참했다. 아무도 웰빙 메뉴에 눈길을 주지 않은 것이다. 이유는 칼로리를 걱정하는 사람은 애초에 햄버거 매장에 오지 않기 때문이었다. 맥도날드에 방문하는 고객의 대부분은 칼로리가 낮은 음식보다는 '더 맛있는 햄버거'를 원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설문 조사는 어떻게 된 것일까? 사실 고객이 '예스(Yes)'라고 대답한 것은 '그럴 것 같다'라는 추측에 불과했다. 고객이 정말로 구매를 결정짓는 것은 매장에서 메뉴를 고민하는 순간이다. 따라서 매장에 가기 전 설문 조사 결과를 구매 결과로 믿은 판단은 처음부터 잘못되었던 것이다. 고객이 어떤 제품을 원하는지 알기 위해서는 그들의 마음 깊숙한 곳의 진심을 보는 노력이 필요하다. 또한 추측을 배제하고 정말 구매를 결정하는 순간을 고려해야 한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좋은 제품보다 고객 경험이 더 중요

기업이 자주 하는 두 번째 실수는 제품을 사용하는 고객이 어떤 경험을 하고 있는지는 알지 못한 채 기능이 더 좋은 제품만 내면 팔리려니 생각하는 것이다.

1998년 출시된 대우전자의 마이더스 세탁기는 세제를 넣지 않아도 세탁을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물도 적게 소모했다. 돈도 절약해 주면서 친환경적이기까지 하니 인기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이 제품, 과연 얼마나 팔렸을까? 불행하게도 이 제품은 소비자들에게 철저하게 외면당했다. 그 이유는 거품이 없으면 빨래가 깨끗하게 빨리지 않을 것 같다는 주부들의 고정관념 때문이었다.

이처럼 고객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서는 성능이 좋은 제품을 만드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제품을 실제 사용하는 과정에서 고객이 어떤 경험과 생각을 하고 있는지 사용 패턴이 어떠한지까지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고객의 사소한 불평에 귀 기울여야

세 번째 실수는 고객의 사소한 불평, 불만을 투정이라 생각하고 무시하는 것이다. 1999년 도시바의 신형 VTR을 구입한 한 고객은 제품에 작은 결함을 발견하고 수리를 요청했다. 그런데 전화를 받은 직원은 "당신 같은 사람을 상습 불평꾼이라고 한다"며 불만을 무시했다. 그러자 고객은 통화 내용을 인터넷에 올렸고, 사람들은 도시바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도시바는 이 문제가 별일이 아니라며 사건을 축소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통화 내용에 대한 인터넷 조회 수가 1개월 만에 200만 건에 달하고, 사건을 다룬 기사가 신문에 실리는 등사건은 일파만파로 번졌다. 결국 도시바의 당시 부사장이 정식으로 사과하며 일단락됐다. 하지만 도시바의 이미지는 회복하기엔 이미 바닥에 떨어진 후였다.

많은 기업들이 고객 중심 경영을 하고 있다고 하면서도, '이 정도쯤이야'라며 사소한 불만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진정한 고객 중심 경영은 사소한 불만 하나까지도 귀 기울여 듣는 것에서 시작한다. 특히 요즘처럼 인터넷과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가 발달해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향력이 엄청나게 커진 시대에는 더욱 그렇다.

고객과 기업의 생각은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난다. 아무리 고객 중심을 외쳐도 기업의 입장에서만 고객을 바라보면 진정한 고객 중심 경영을 할 수 없다. 기업이 직접 고객이 되어 본다는 자세로 고객의 마음을 깊숙이 바라보고 이해해야 한다. 기업만의 짝사랑은 이제 그만 끝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