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그룹 최태원 회장이 최근 주재한 SK하이닉스 임원 회의는 심각한 분위기였다. 최 회장은 "투자를 했으면 이익을 내야 한다"며 "앞으로 2~3년 정도만 기다려주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반도체 불황으로 SK하이닉스의 적자(赤字) 행진이 이어지는 것을 염두에 둔 발언이었다. SK 관계자도 "확정된 건 아니지만 그룹 차원의 구조조정 방안을 검토 중인 건 맞다"고 확인했다.

경기침체가 장기화하면서 국내 일부 대기업들도 본격적으로 구조조정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포스코가 최근 계열사 소유의 베트남 다이아몬드 플라자·창원 대우백화점·부산 센트럴스퀘어 등 유통부문을 일괄매각하기로 한 것은 그 신호탄이다. 일부 대기업이 구조조정 움직임을 보이는 데는 경기 불황이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지만, 그동안 계열사를 마구 늘리는 방만 경영을 한 측면도 크다는 지적이다.

국내 대기업은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가 터졌을 때도 구조조정을 거의 하지 않았다. 대신 금융위기 직후 중국이 경기 부양을 위해 4조위안(약 850조원)을 풀자 중국 특수(特需)가 일어났고 오히려 고성장을 누렸다. 10대 그룹 계열사 총 숫자는 2007년 364개에서 2012년 638개로 두 배가량 늘었다. 이 중에는 신성장동력을 찾기 위한 불가피한 계열사 증가도 있었지만, 상당수는 회사 몸집을 키우기 위한 '문어발 확장'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유럽 재정위기가 지속되고 중국이 예전처럼 8% 이상의 고성장을 하지 못하는 침체 국면이 이어지면서 방만 경영이 발목을 잡았고, 결국 기업들이 직격탄을 맞고 있다는 지적이 많다. 재계 관계자는 "삼성과 현대차 등 일부 기업을 제외한 국내 기업들이 떠밀려 가듯 구조조정에 나서는 양상"이라고 했다.

사옥·점포·공장 팔아 일단 현금화

기업들의 구조조정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우선 하반기 들어 일부 기업은 재무 개선을 위해 돈 되는 자산을 무차별적으로 현금화하고 있다. 최근 수년간 공격적으로 사세(社勢)를 키워온 기업들이다. 현대그룹은 지난 8월 서울 연지동 사옥을 코람코자산운용에 2262억원에 넘기고 현대그룹은 세입자가 됐다. 매각 대금은 각 계열사가 사옥 매입 당시 참여분만큼 되가져갔다.

포스코가 팔려고 내놓은 건물들… 포스코가 경기 불황을 맞아 비주력 유통부문 사업체를 일괄 매각하기로 했다. 왼쪽부터 베트남 호찌민시에 있는 다이아몬드 플라자, 창원 대우백화점, 부산 센트럴스퀘어.

사옥뿐 아니라 영업점, 공장까지 매각해 현금 확보에 주력하는 기업도 늘고 있다. CJ그룹은 지난달 CJ제일제당의 경남 양산 밀가루공장과 CJ GLS의 충북 옥천, 청원, 경북 경산 등 물류센터 3곳, CJ시스템즈의 인천 송도 IT센터 등을 매각 후 재임대하는 '세일 앤드 리스백' 방식으로 1500억원의 자금을 확보했다. CJ그룹 측은 "대한통운 인수 과정에서 1조원의 자금을 소진했기 때문에 유동성 자금을 확보하는 차원"이라고 말했다. 내수 부진에 시달리는 홈플러스도 서울 영등포점 등 4개 점포를 팔았다.

STX그룹은 계열사 지분 매각을 선택했다. 이 그룹은 STX에너지 경영권을 유지하는 조건으로 일본 종합금융회사인 오릭스사에 최대 49%의 지분을 매각할 방침이다.

◇계열사 흡수합병으로 조직 슬림화

계열사 간 흡수합병을 선택하는 기업도 있다. 롯데는 롯데쇼핑롯데미도파를 합병한 데 이어 내년 초까지 3, 4건의 계열사 간 합병을 추가로 진행할 예정이다. 글로벌 경기침체 등 대내외 여건이 악화한 상황에서 내린 결정이다. 계열사 호남석유화학의 경우 연말까지 케이피케이칼을 합병하기 위한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STX그룹은 STX메탈STX중공업의 합병을 결정했으며, CJ그룹도 택배 계열사인 CJ GLS와 CJ대한통운을 합병해 동일한 사업을 하는 두 회사를 합쳐 효율성을 극대화한다는 계획이다.

하지만 대기업 중심의 이 같은 구조조정은 연쇄적으로 고용 악화와 내수 위축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계열사 흡수합병은 그룹 내 중복 조직을 없애는 것이어서 뒤이어 인력 구조조정이 나타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재계 관계자는 "연말에 나올 살생부 명단이 더 무섭다"고 말했다.

박상용 연세대 경영전문대학원장은 "대기업 구조조정은 나라 경제 전체적으로 경기 침체를 더욱 가속화하는 악순환을 불러올 수도 있다"며 "대기업의 긴축 경영으로 특히 중소·중견 기업들이 더 큰 영향을 받는 만큼 정부나 민간단체가 적절한 조율자 역할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