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만호 산은금융그룹 사장은 최근 한 건설회사 사장을 만났다. 이 건설사는 임직원이 6000명이 넘는 도급 순위 5위권 업체로, 큰 공사를 맡을 때 산업은행이 목돈을 빌려주던 회사다. 그런데 윤 사장은 건설회사 사장에게 뜻밖의 제안을 했다. "다른 은행보다 좋은 조건에 임직원 신용대출을 해줄 테니 생각해 보시라"는 내용이었다.

'다이렉트 뱅킹'이라는 온라인 고금리 예금 상품을 내세워 점포망이 취약한 약점을 극복한 산업은행이 이번에는 개인 대출시장 공략에 나섰다. 거래 기업 임직원들을 상대로 저금리 신용대출 상품 판매에 나선 것이다. 어느 한 기업을 뚫어 해당 기업 임직원 전체를 대출 고객으로 만드는 방식이다.

산은이 개인 예금시장에 이어 개인 대출시장을 본격 공략하고 나선 것은 민영화를 염두에 두고 개인 금융 비중을 높이기 위한 전략으로 시장은 분석하고 있다. 하지만 다른 은행들은 "산은이 정부를 등에 업은 국책 은행이란 우월적 지위를 남용해 시장 질서를 교란하고 있다"며 반발하고 있다.

산업은행, 이번엔 대출시장에서 '가격 파괴'

강만수 산은금융그룹 회장은 지난 5일 박용만 두산그룹 회장과 임직원 집단대출에 대한 업무협약(MOU)을 체결했다. 이 협약에 따라 산은은 두산 임직원들에게 1인당 1억5000만원 한도로 평균 연 4.8% 금리에 신용대출을 해주고 있다. 현재 다른 시중은행의 집단대출 금리는 5% 중후반대. 두산 임직원 2만여명은 산은 덕에 시중 평균 금리보다 0.5~1%포인트 싼 이자로 돈을 빌려쓸 수 있게 됐다.

산은은 그동안 거래해온 다른 대기업 계열사 경영진과도 전방위로 접촉하고 있다. 올해 봄부터 지금까지 70여개 기업에 집단대출을 하기로 약속을 받았고, 협약을 맺은 회사 임직원들에게 200억원의 대출 실적을 올렸다.

산은이 직장인 집단대출에 열을 올리는 이유는 점포 수나 영업 인력이 일반 시중은행에 비해 훨씬 적기 때문이다. 산은의 지점은 80개로 1172개인 국민은행의 15분의 1 수준이다. 영업 인력 역시 다른 은행의 10분의 1에도 못 미친다. 현재 산은의 개인대출 실적(잔액 기준)은 8000억원으로 최대 시중은행인 국민은행(약 100조원)의 100분의 1도 안 된다.산은 관계자는 "여건상 우리는 한 번에 많은 고객을 끌어당기는 전략을 쓸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런 방식은 지난해 산은이 '다이렉트 뱅킹'으로 예금 시장을 파고든 것과 같은 원리다. 다이렉트 뱅킹이란 고객이 은행 지점을 거치지 않고 인터넷뱅킹을 통해 예·적금을 하는 것으로, 지점 유지 비용이 들지 않는 만큼 예금 금리를 높여준다는 원리이다. 산은은 같은 방식으로 수시 입출금 계좌에도 연 3.25%의 높은 이자를 주며 고객을 대거 유치해 총 12조원대 예금을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다른 은행들 "불공정 경쟁" 불평

산은이 집단대출 시장을 공략하고 나선 데는 이렇게 모인 돈이 기반이 됐음은 물론이다. 산은은 집단대출을 크게 늘려 개인대출 실적을 올 연말까지 2조원까지 끌어올린다는 목표를 갖고 있다.

산은의 개인 신용대출 가격 파괴에 대해 다른 은행들은 상당히 민감한 반응을 보이며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시중 은행들의 일차적인 반응은 불공정 게임이란 비판이다.

A은행의 임원은 "정부 보증을 받는 산은이 높은 신용도를 활용해 지나치게 낮은 금리를 제시하고 있어 불공정한 경쟁을 하는 느낌"이라고 했다. 은행권에서는 개인 신용대출을 4%대 금리로 하면 역마진이 생길 수 있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B은행 관계자는 "국책 은행으로서 그동안 자금 지원을 해준 대기업들의 팔을 비틀어 집단대출을 강요하는 것 아닌지 의심스럽다"고 말했다. 금융당국의 한 관계자도 "가계대출이 이미 포화상태인데 산은이 무리하게 비집고 들어가려는 것 같다"며 "저금리 대출 영업이 얼마나 지속 가능한지도 의문"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산은 고위 관계자는 "결코 무리한 영업이 아니다. 다른 은행들은 가산금리를 많이 붙이는 관행을 탈피하지 못하기 때문에 대출 금리를 낮추지 못하는 것"이라고 반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