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인피니언(Infineon)은 글로벌 시장에서 자동차 반도체 2위, 산업용 반도체 1위, 보안·칩카드 1위를 달리는 회사다. 작년 매출 6조원에 영업이익 1조2000억원을 기록했다. 유럽 재정위기에도 불구하고 2010년보다 매출은 21%, 영업이익은 65% 증가했다. 영업이익률 20%는 삼성전자 반도체 부문의 2배에 달한다. 일본의 소재회사 도레이(Toray)도 작년 영업이익이 전년보다 40% 증가하며, 일본 소재·부품의 저력을 보여주고 있다.
유럽 재정위기로 촉발된 세계적인 경기침체에도 독일·일본 부품·소재 기업들은 탁월한 기술력을 바탕으로 높은 시장점유율을 유지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독일과 일본 경제의 진정한 힘은 완제품 업체보다 이들을 강력하게 뒷받침하는 '히든 챔피언(Hidden Champion·강소기업)'에게 있다고 평가한다.
◇기술력 원천은 압도적인 연구 인력
인피니언의 힘은 전체 2만6000명의 직원 중 9000명에 달하는 연구인력에서 나온다. 전 직원의 35%가 연구인력이다. 이에 비해 삼성전자는 25%, 현대·기아차의 경우 8%에 불과하다.
인피니언 아·태지사(싱가포르 소재)의 관할 인원은 1만4000명으로, 유럽 본사의 1만1000명보다도 많다. 앤드루 청(Chung) 지사장은 "싱가포르만 따져도 전직원 1700명 중 설계인력·엔지니어가 800명이나 된다"면서 "인피니언의 모든 경쟁력은 이들이 최고 능력을 발휘하도록 하는 데서 나온다"고 말했다.
인피니언은 아시아 지역의 우수 인재를 대거 발굴, 성장하는 아시아 시장을 장악했다. 청 지사장은 중국계 호주인, C S 성(Seoung) 자동차반도체 본부장은 중국계 싱가포르인, 관리책임자는 말레이시아인이었다.
일본 도레이의 핵심 경쟁력도 전체 직원의 40%에 달하는 3000명의 연구개발자다. 당장 이익이 나지 않더라도 핵심 인력들이 장기간 연구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해주는 환경도 강점이다. 폴리아미드나 탄소섬유 등 기술은 30~40년 전부터 성공 가능성을 믿고 꾸준히 연구개발에 집중했기 때문에 큰 결실을 거뒀다. 도레이의 한국 자회사 도레이첨단소재의 와타나베 다쿠오(渡邊拓生) IT재료연구실장은 "한국은 기초기술·소재에 반드시 필요하지만 결과가 쉽게 나오지 않는 분야보다는 당장 결과가 나오는 응용분야에 집중하는 것 같다"면서 "소재 산업의 경쟁력을 키우려면 시간을 두고 사람을 키우고 장기간 투자하는 안목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소재·부품 기술력으로 무장한 강소기업 즐비
독일·일본에는 탄탄한 소재·부품 기술력으로 무장한 강소기업이 즐비하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볼린 아르마투렌파브릭도 그중 하나다. 자동화 기계와 발전기 등에 들어가는 밸브를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직원 30명의 소기업이다. 2009년 경제위기로 밸브 업계가 불황에 빠졌지만, 이 회사는 매출에 별 타격이 없다. 오너 겸 CEO(최고경영자) 볼린 프라드는 "1923년 창사 이후 아무리 경제가 어려워도 10% 이상 매출이 줄어든 적이 없다"며 "품질이 월등하기 때문에 유럽뿐 아니라 미국과 중국 등 전 세계에서 우리 밸브를 사용하는 기업이 2000곳을 넘는다"고 말했다.
독일은 34만개의 중소기업이 수출에 참여하고 있다. 전체 수출기업 중 98%를 차지한다. 세계 시장점유율 1·2위를 다투는 이른바 '히든 챔피언'은 1990년대 중반 500곳에서 현재 1500곳 이상으로 늘어났다. 이 가운데 3분의 2는 해당분야 1위 업체다.
일본도 마찬가지. 산업·연구용 미세현미경 분야 세계시장 점유율 70%를 자랑하는 오미크론 나노테크놀로지는 직원 100명에 40%가 연구개발 인력이다. 직원 75명의 니푸라는 전 세계 대형수족관 투명패널의 70%를 공급한다. 코엑스 아쿠아리움도 이 회사 제품을 쓴다. 직원 70명의 하모닉 드라이브시스템즈는 로봇의 동작 속도를 제어하는 분야에서 시장점유율 40%를 자랑한다.
◇불경기에도 핵심부품·소재 업체는 건재
완성품 제조는 해외에 주도권을 넘기더라도 핵심부품의 시장 장악력은 절대 놓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일본은 미국 보잉의 최신 여객기 'B787'을 '준(準)국산기'로 부른다. 전체 부품의 35%, 특히 핵심 소재 상당 부분을 스미토모정밀·도레이·가와사키중공업·후지중공업 등 일본 기업이 담당했기 때문이다. B787은 동체 외부가 탄소복합재로 만들어져 가벼우면서도 강도가 높은 것으로 유명한데, 일본 소재기업이 없이는 절대 이룰 수 없는 성과였다.
애플 스마트폰 '아이폰'에도 일본 부품 사용이 계속 늘고 있다. 일본 업계에 따르면, 최신 제품인 '아이폰 5'에 들어가는 1000여개 부품 가운데 40%를 일본에서 공급했다. 독일 아헨공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허승진 국민대 교수(자동차공학)는 "독일·일본 소재·부품 회사들의 기술력은 다른 나라가 쉽게 대체하기 어렵다"면서 "일부 완제품 메이커가 부진한 것과 별도로 산업의 전체 경쟁력은 여전히 굳건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