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 오후 2시 지방의 한 공업단지에 위치한 자동차 부품업체 A기업. 높이가 3m는 돼 보이는 육중한 프레스 기계가 작동을 멈춘 채 그대로 서 있었다. 평소 같으면 작업자들로 분주해야 할 시간이지만 작업자들은 기름때 묻은 장갑을 벗어둔 채 3~4명씩 모여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이 업체는 1차 협력사를 거쳐 현대·기아차에 운전석 모듈 부품을 납품하는 2차 협력업체로 현대·기아차 노조의 파업으로 최근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공장을 안내한 A기업 P사장은 한숨을 길게 내쉬며, 현대·기아차 파업에 대한 울분을 토로했다.

작업이 중단된 공장 모습.

P사장은 “7월부터 내수불황 여파로 부품 주문이 줄어든 상황에서 현대·기아차의 파업 여파로 요즘 공장가동을 일주일에 3일씩만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대로 가면 추석 때 직원들 떡값도 주기 어려운 상황인데, 현대·기아차가 성과급 돈잔치를 했다는 소식을 듣고 정말 달려가서 멱살을 잡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현대·기아차 노조는 올해 7~8월 약 50여 차례 부분파업과 잔업·특근거부를 통해 수차례 생산차질을 빚은 끝에 사상 최대 성과급이라는 목적을 달성했다. 그 결과 현대차는 2260만원, 기아차는 2000만원 안팎의 돈을 연말까지 받게 된다. 이는 웬만한 중소기업의 초봉임금과 맞먹는 수준이다. 이를 자랑하 듯 현대차 노조는 홈페이지를 통해 1인당 2728만원 인상효과라며, 역대 최대 기본급 인상이라고 내세웠다.

◆ 노조만 배부른 현대·기아차 '파업'…"피해는 고스란히 부품업체로"

이 공단에는 20여개의 크고 작은 자동차 부품업체들이 몰려 있었지만 이날 공장을 가동한 업체는 불과 5곳에 불과했고, 그 마저도 가동률이 40~50%로 낮은 상태였다.

B업체의 한 임원은 "현대·기아차의 파업과 경기 침체로 공급물량이 평소의 절반 이하로 줄었고 그 여파가 7월부터 이어지고 있다"면서 "공장이 노는 것보다는 돌리는 게 좋다는 생각에 가동은 하고 있지만, 물량이 적어 전기료도 안 나올 판"이라고 말했다.

실제 현대·기아차는 7~9월에 걸쳐 총 61번의 부분파업과 잔업·특근거부를 통해 14만4978대의 생산차질(매출손해 2조7396억원)이 발생했다. 이는 현대·기아차 상반기 내수판매량의 25%를 차지하는 물량이다.

가동을 멈춘 현대차 생산라인 모습

파업으로 인한 생산차질은 최근 경기침체와 맞물리면서 판매가 급감하는 사태로 이어졌다. 그 결과 현대차는 지난달 내수판매가 3만5950대로 2009년 1월 3만5396대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다. 전년 동기 대비 판매증가율은 2009년 5월 이후 처음으로 마이너스 성장세로 돌아섰다. 기아차도 12.4% 줄어든 3만2078대 판매에 그쳤다. 이는 2009년 8월 2만5184대 판매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이다.

B업체 임원은 “현대·기아차의 성과급은 2차 부품 협력업체의 생산직 근로자가 일년동안 뼈빠지게 일하고 받는 1년치 급여 수준”이라면서 “현대·기아차 노조가 파업으로 협력사는 문닫게 만들고 협력사 노동자들의 상실감만 키우는 노동운동은 이제 그만했으면 한다”고 털어놨다. 이 임원은 “차가 잘팔려도, 안팔려도 현대·기아차 노동자들 월급은 끊임없이 오르지만 우리는 호황이건 불황이건 상관없이 늘 살얼음판”이라며 “대체 언론에서 말하는 상생(相生)은 어디에 있냐”고 말했다.

김필수 대림대학 자동차과 교수는 “현대·기아차 파업으로 8월 생산량이 줄면서 재고·생산관리 비용을 지출한 부품업체들은 자금회전이 안 되면서 힘들어하는 상황”이라면서 “이 같은 상황에서 현대·기아차는 협력사들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지원책들을 펼쳐야 하며, 현대·기아차 노조도 책임 있는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 부품사, 국내 완성차 ‘올인’은 위험…“공급망 다변화 필요”

완성차업체가 파업을 예고하면 일반 사람들은 파업에 대비해 부품을 미리 생산해 놓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금 사정이 여의치 않은 2·3차 협력사가 재고와 추가 생산비용을 감당하며 부품을 미리 생산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더군다나 요즘 자동차 생산방식은 도요타가 개발한 ‘모듈화(Module)’와 ‘적기 공급 생산방식(JIT)’이다. 재고 부담을 최소화하기 위해 완성차 공장과 부품 공장이 톱니바퀴 돌 듯 정교하게 맞물려 돌아가면서 부품이 공급되는 상황이어서 재고를 미리 생산하기는 어렵다. 실제 대부분의 협력사가 부품을 생산에서 자동차 공장에 공급하기까지 채 4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따라서 완성차 업체들의 파업 여파로 줄어든 생산량은 1차는 물론 2·3차 협력사로 내려갈수록 손실 폭을 키운다. 현대·기아차 노조원들이야 수천만원의 성과급을 챙기고 파업을 거두면 끝이지만 그 기간동안 2·3차 협력사는 매출이 줄면서 종업원들이 성과급을 챙기긴 커녕 회사가 망할 가능성이 커진다.

또 다른 공단의 C기업은 르노삼성에 부품을 공급하는 업체였다. 평소같으면 한창 바빠야 한 오후 3시였지만 이 업체의 기계들은 가동을 멈춘 채 서 있었다.

C기업 관계자는 “요즘 같은 상황에서 르노삼성에 부품을 공급하는 업체들은 돈보다는 미래를 보고 일하는 상황이라는 게 정확한 설명”이라면서 “르노삼성의 판매부진으로 부품물량이 크게 줄면서 수익성이 떨어졌고, 이로 인해 현재 많은 부품업체가 (르노삼성에서 다른 자동차 업체로) 이탈하고 있다”고 말했다.

르노삼성의 경우 지난달 국내외 시장에서 총 1만1082대(내수 4001대·수출 7081대)를 기록해 판매가 전년 동기 대비 59.4% 줄었다.

이처럼 많은 자동차 부품 협력회사들이 자동차 업계의 파업과 내수불황에 따라 힘든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일부 업체의 경우 평소와 같이 공장을 가동하는 업체도 있었다. 이들 업체는 어려움을 극복하는 비법에 대해 ‘공급망의 다변화’라고 설명했다.

D부품업체의 경우 과거 90%에 육박했던 국산차와의 거래비중을 현재는 40% 수준으로 낮춰 GM, 폴크스바겐 등 해외 글로벌 완성차 업체에 직접 부품을 공급하고 있다고 했다. 특히 최근 일본업체들 부품구매임원들의 방문이 늘면서, 일본 부품시장 진출에도 꾸준한 노력을 펼치고 있었다.

한 부품업체의 공장 내부 모습.

D업체의 한 임원은 “현대·기아차 등 국내 완성차 업체들에 올인하는 업체들에 비해 파업, 내수불황 등의 영향은 적다. 하지만 최근 유럽위기로 인해 물량은 다소 줄어든 상태”라고 말했다.

김필수 교수는 “중소 부품업체의 경우 하루살이 식으로 한 달 벌어 직원들 월급 주는 경우가 많고 위기대응에 취약해 완성차 업체들의 적극적인 지원책이 필요한 상황”이라면서 “하지만 부품업체들도 현대·기아차 등 국내 완성차 업체만을 바라볼 게 아니라 적극적인 해외진출로 공급망을 다변화해 경쟁력을 갖출 필요는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