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과 전문의 장모(42)씨는 지난 2008년 종합병원 과장 자리를 박차고 나와 개인 병원을 차렸다.

임차료와 시설 자금이 부족해 7억원을 은행에서 빌렸다. 하지만 글로벌 금융위기를 맞아 불황을 겪던 시기라 찾아오는 환자가 적었고, 주변에 경쟁 의원이 여럿 생기면서 1년도 안 돼 폐업했다. 장씨는 2009년 다른 의원을 인수하면서 2억원을 추가로 빌렸지만 이번에도 수익을 내지 못해 1년 만에 또 문을 닫았다. 병원을 차릴 여력이 없어진 그는 2010년 월급 의사 생활로 돌아갔지만, 남은 부채를 갚을 도리가 없어 최근 법원에 채무재조정(회생절차)을 신청했다.

변호사 박모(51)씨는 은행 대출을 받아 법률사무소를 차렸지만 기대만큼 수입이 들어오지 않았다. 생활비가 부족해 카드사와 대부업체에서 추가로 대출을 받았다. 대출 원금은 2억5000만원이었는데, 못 갚은 이자만 9000만원으로 불어났다. 결국 신용불량자로 전락한 박씨는 올 초 신용회복위원회에 개인워크아웃을 신청했다.

경기 침체의 골이 깊어지면서 의사·변호사·한의사·회계사와 같은 전문직들도 불황의 여파에 신음하고 있다. 매년 수천 명이 새로 자격증을 받고 쏟아져 나와 경쟁이 갈수록 치열한 데다, 불경기까지 겹쳐 파산 위기에 몰리는 전문직 종사자들이 크게 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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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 10% 이상이 신용불량자"

6일 본지가 2009년 이후 지난달까지 서울중앙지법에 일반회생(채무재조정 절차의 일종)을 신청한 742명의 직업을 분류한 결과, 47%에 해당하는 348명이 의사·변호사·치과의사·한의사·약사였다. 일반회생은 담보가 있을 때 10억원을 넘고, 담보가 없을 경우 5억원을 넘는 빚에 대한 채무재조정 신청을 뜻한다.

일반회생을 신청한 전문직은 글로벌 금융위기가 진행되던 2009년 93명이었다가 2010년 82명으로 줄었지만 지난해 107명으로 늘어났다. 올해는 8월까지 66명이 신청했는데, 경기 부진이 장기화되고 있기 때문에 연말까지는 작년과 비슷하거나 이를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법원 관계자는 "초기에 임차료·시설비가 많이 들어가는 의사·한의사·치과의사가 수억원을 빌렸다가 수익을 내지 못해 폐업하고 빚을 탕감해 달라며 찾아오는 경우가 점점 늘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 시내에서 개인병원을 운영하는 의사 A씨는 "경기가 나쁘다 보니 환자들이 미용이나 건강 유지처럼 당장 필요하지 않은 진료는 덜 찾는다"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서울 강남 일대의 성형외과들이 줄줄이 도산하고, 다양한 기능성 건강식품이 쏟아지면서 보약을 찾는 사람이 줄어들어 한의원들이 줄줄이 문을 닫는다는 말이 의료계에서 나오고 있다. 한 의료계 관계자는 "전체 의사의 10% 이상이 신용불량자라는 말이 나돈다"고 전했다.

은행들도 전문직들에게 예전처럼 마냥 돈을 빌려주지 않는다. 하나은행의 의사 전용 상품인 '닥터클럽'의 대출액은 2010년 말 2조9379억원이었지만, 올해 7월 기준으로는 2조5977억원으로 1년 반 사이 3000억원 넘게 줄었다. 경기가 나빠 새로 병원을 내려는 수요가 줄어든 결과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전문직들의 신용도가 예전만 못하다"고 했다. 각 은행의 변호사 전용 대출 역시 계속 줄어드는 추세다.

아예 휴업하는 변호사·회계사 갈수록 늘어

변호사와 회계사 중에서는 아예 자격증을 장롱 속에 넣어두고 정부기관이나 기업체에서 다른 일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크게 늘어나고 있다. 2004년 휴업 변호사는 전체의 8.6%인 592명이었지만, 올해는 17.6%인 2507명에 달한다. 회계사 역시 같은 기간 휴업자가 1753명(24.5%)에서 4880명(32.6%)으로 증가했다. 다른 일을 하려는 변호사·회계사는 회원비를 내지 않기 위해 협회에 휴업 신청을 하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집계가 된다.

변호사·회계사는 10년 전부터 매년 1000명씩 쏟아지고 있으며, 이 때문에 신규 인력 공급이 넘쳐 경쟁이 치열하다는 것은 더이상 새로운 얘기가 아니다. 최근에는 경기 하락까지 겹쳐 악전고투하고 있다며 고통을 호소한다.

판사 출신인 변호사 B씨는 "새로운 부동산 개발 사업이 많아야 계획부터 시공까지 단계마다 자문 업무가 생기고 그에 따른 분쟁도 많아져 일감이 늘어나지만, 요즘은 부동산 시장이 죽어버려 일감이 확 줄었다"고 말했다. 대형 로펌의 변호사 C씨는 "비용 줄이기에 나선 대기업들이 외부와 분쟁이 생겨도 로펌에 의뢰하지 않고 자체적으로 해결하려 든다"고 했다.

'빅4'라고 불리는 4개 대형 회계법인은 컨설팅 분야 매출이 2010년 4417억원에서 2011년 3926억원으로 1년 사이 11% 급감했다. 대기업들이 인수·합병(M&A)을 시도하지 않고 신규 투자를 위한 파이낸싱을 줄이면서 일감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영업 압박이 심해지고 연봉이 잘 오르지 않아 회계법인을 떠나는 젊은 회계사들의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올 초 예금보험공사가 경력 회계사 15명을 뽑으면서 경력을 인정하지 않고 신입사원 대우로 뽑는다고 했지만 174명이 지원해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다. 금융감독원의 올해 신입사원 공채에는 101명의 회계사가 지원해 그 중 9명만 합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