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입 자동차에 밀려 국내 업체들의 고급 차량 판매량이 급감하고 있다. 현대차 에쿠스·제네시스, 기아차 K9(오피러스), 쌍용차 체어맨 등 국산 고급차의 월 평균 판매량은 2009년 5700대에서 올해(1~8월 기준) 3600대까지 매년 떨어지고 있다. 지난 5월 기아차 K9 출시에 따른 반짝 상승 효과도 불과 넉달 만에 사라졌다. 고급차는 소형차보다 이익이 많이 남는 차종이어서 내수 시장에서의 고급차 판매 부진은 글로벌 자동차 시장에서의 경쟁력 약화로 이어질지 모른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고급차 시장에서 밀리는 국내 업체

업계에서는 '국산 고급차 시장 자체가 크게 축소되는 것 아니냐'는 분석도 나온다. 올 들어 국산 고급차 판매는 지난 4월 3200대에서 6월 4800대로 회복되는 듯했지만, 7월 4000대에 이어 지난달 2700대까지 추락했다.

기아차가 수입차에 빼앗긴 시장을 되찾겠다며 내놓은 K9도 판매량이 갈수록 줄고 있다. 기아차는 당초 월 2000대 판매목표를 제시했지만, 첫 달인 5월 1500대, 6월 1700대, 7월 1400대로 한 번도 목표 달성을 못했다. 지난달에는 800대 선까지 떨어져 신차 효과가 사라졌다. 주우진 서울대 교수(경영학)는 "K9이 품질은 우수하지만 브랜드 파워와 가격 경쟁력에서 수입차 공세를 막아내기 힘든 것 같다"고 말했다.

고급차 판매가 줄면서 국내 자동차 업체의 내수 시장 수익성도 악화될 전망이다. 국내 업체들은 그동안 중소형 차보다는 이익이 높은 대형 고급차를 많이 팔아 수익을 올려왔다. 하지만 고급차가 계획된 판매량에 크게 미달하면서 오히려 수익성이 떨어지는 상황을 맞게 됐다. K9 개발에는 5000억~6000억원이 투입된 것으로 추산된다. 업계에서는 K9이 월 2500대는 팔려야 손익분기점을 넘을 것으로 보고 있다. 수입차 방어를 위해 투자비는 크게 늘렸는데, 판매는 오히려 줄어드는 이중고(二重苦)를 겪게 된 셈이다.

◇브랜드파워 한계에 파업 악영향까지

국산 고급차 판매가 줄어든 이유는 여러 가지다. 브랜드 가치나 서비스 품질이 일부 수입차 브랜드와 차이가 나는데도, 무리하게 수입차 수준으로 차값을 올렸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BMR컨설팅 이성신 대표는 "국산 고급차를 구입하는 계층이 감당할 가격 한계가 존재하는데 이를 무시하고 가격을 올리는 바람에 총 판매대수가 줄어들게 됐다"고 말했다.

현대·기아차가 의도했던 수입차 고객 끌어들이기는 아직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현대차 관계자는 "최근 내부 시장분석에 따르면 국산차를 타다가 수입차로 넘어갔던 고객이 복귀하거나, 수입차 고객이 우리 회사로 넘어오는 비율은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말했다. K9이 수입차 고객을 끌어들이는 것보다는 다른 국산 고급차 고객을 빼앗아 오는 결과만 낳았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국산차 업체의 공급자 위주 시장전략이 더 이상 먹히지 않기 때문이라는 의견도 있다. 국내 업체들은 "이 정도로 품질 좋게 만들었으니 비싸게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고급차 고객에게는 이런 논리가 잘 통하지 않고 있다. 아우디코리아 한동률 차장은 "중소형차 시장에서는 가격 대비 품질 면에서 국산차가 다소 앞선 측면이 있지만 고급차 시장은 수입차 쪽에 얼마든지 대안이 많다"고 말했다.

지난달 말까지 지속된 현대·기아차 파업도 고급차 고객들에게 악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고객의 선택 폭은 계속 넓어지고 있는데, 국내 업체의 내부 집안싸움이 소비자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국산 고급차 시장이 줄어든 가운데, 지난달 국내 수입차 판매는 5개월 연속 월 1만대를 돌파했다. 8월 수입차 판매량은 1만576대로 1년 전보다 16% 증가했다. 국내 완성차 5개사 판매가 1년 전보다 25% 감소한 것과 대조적이다. 수입차협회 윤대성 전무는 "지난달 국내 자동차 시장에서 수입차 점유율은 사상 처음 11%대를 기록했다"며 "상용차·경차를 제외하고 승용차·SUV(스포츠유틸리티 차량) 시장만 비교할 경우에는 점유율이 15%에 달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