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급발진과 관련, 미국 등 소비자 보호제도가 마련된 선진국에선 급발진 피해자가 자동차 제조사와의 재판에서 승소해 피해를 보상받은 사례가 있다. 또 자동차 회사들은 급발진 우려가 있는 차종에 대해 대규모 리콜을 실시, 차량을 교환 또는 수리해주고 있다.

크라이슬러그룹의 지프 그랜드체로키

미국 법원은 1990년대 후반 수백만 달러 규모의 급발진 사고 관련 소송에서 닛산, 아우디, GM 등 자동차 업체들에 패소 판정을 내렸다. 크라이슬러는 1996년 급발진 유발 차량으로 지목된 사륜구동 체로키를 구매한 소비자들에게 무상 수리를 해주기로 합의한 적도 있다.

포드 토러스(위)와 벤츠 ML클래스 SUV(아래)

급발진이 의심된다는 이유로 자동차 업체가 대규모 리콜을 한 사례도 있다. 도요타는 2009~2010년 매트(발판)가 가속페달을 누를 수 있다는 이유와 가속페달이 제대로 복원되지 않을 가능성 등을 이유로 600만대가 넘는 차량을 리콜했다. 메르세데스벤츠도 이달 13일 매트가 페달에 끼어 급발진을 유발할 수 있다는 이유로 2012~2013년형 ML클래스 SUV 8675대의 리콜을 결정했다. 또 포드는 올해 3월 2005~2006년형 토러스 36만대를 리콜했다.

이처럼 미국의 소비자와 급발진 피해자들이 보호를 받는 이유는 ‘제조물책임법(PL, product liability)’과 같은 강력한 소비자 보호제도가 갖춰져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제조물책임법은 급발진 피해를 본 소비자가 자동차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면 ‘자동차에 결함이 없다’는 사실을 자동차 제조회사가 입증하도록 재판관이 명령할 수 있다.

반면 우리나라의 경우 2002년 7월부터 제조물책임법을 시행했지만, 자동차 업계는 책임을 피해갈 수 있었다. 법 4조 1항 2호가 ‘제조업자가 당해 제조물을 공급한 때의 과학·기술 수준으로 결함 존재를 발견할 수 없을 경우 그 책임을 물을 수 없게 된다’고 되어 있어 자동차 제조사가 책임을 피할 수 있는 상황이다. 이로 인해 아직 국내 급발진 피해자 중에 소송을 통해 피해구제를 받은 소비자는 없다.

미국 도로교통안전국은 날로 확산되는 급발진 사고에 소비자들을 더욱 강하게 보호하고 사고원인을 보다 과학적으로 규명하기 위해 9월 1일부터 EDR(Event Data Recorders·사고기록장치)이 장착된 차량의 경우 급발진 사고가 났을 때 공개를 의무화하기로 했다. 급발진 관련 논란을 줄이기 위해서다. 국내에선 EDR 기록을 공개하지 않는 현대·기아자동차도 미국 수출 차량에 한해서는 EDR을 장착하고 사고가 날 경우 이를 공개해야 한다. 현재 미국 내 91.6%의 차량에 EDR이 장착돼 있다. 최근 독일 연방의회도 EDR의 표준화를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나라의 경우 급발진 피해가 날로 확산되고 있으나 피해를 본 소비자를 구제하기 위한 아무런 보호장치가 없는 상태다. 이런 상황에서 30일 국토해양부가 급발진 사고 2건을 분석한 결과를 발표하면서 “급발진 원인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발표함으로써 자동차 제조회사에 면죄부를 줬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향후 급발진 피해자가 자동차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경우 자동차 회사가 공신력 있는 정부의 발표를 인용해 책임이 없다고 주장할 경우 급발진 피해자는 패소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김필수 대림대 자동차학과 교수는 “급발진 피해자를 구제하는 제도적 장치가 전무한 상황에서 국가기관인 국토부가 단 두건의 급발진 사고만을 조사해 자동차 회사에 면죄부를 주는 결과를 발표한 것은 소비자 피해구제의 길을 완전히 막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우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