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욱 기획재정부 예산실 국토해양예산과장은 "우리 고장에 있는 터널을 사달라"는 A지자체의 민원에 머리가 아플 지경이다. 이미 중앙 정부에서 퇴짜를 놨던 터널을 해당 지자체가 민간자본을 끌어들여 덜컥 지어 놓고, 적자가 나자 "정부가 책임지라"며 매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A지자체 관계자들은 수시로 청탁 전화를 하고, 불쑥 찾아와선 몇 시간이고 "얘기 좀 하자"고 기다린다고 한다.

이 과장은 "하루 1만4000대가 다녀야 적자가 안 나는 터널에 8500대만 다닌다. 1000억원을 들여 만든 터널인데, 답이 안 나온다"고 했다. 사업성은 생각도 않고 일을 저지른 A지자체를 국민 혈세로 구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기재부 예산실 고위 관계자는 "많이 줄었지만, 적게 잡아도 매년 100개 이상의 '악성' 민원이 들어온다"고 했다.

◇다시 돌아온 예산시즌, 민원 백태

정부 산하 B공단의 회계 책임자인 나모(44)씨는 요즘 회사가 아니라 과천 청사로 주말도 없이 출근한다. 예산당국이 공단의 내년 예산을 40억원 안팎 깎자 공단 이사장이 "(예산을) 원상복귀시킬 때까지는 회사로 나오지도 말라"고 불호령을 내린 탓이다. 나씨는 "열 번도 넘게 예산실 담당자를 만나 읍소를 했는데, 더 부탁할 면목도 없어 요즘은 과천청사 인근 커피 전문점에서 혹시 모를 예산실의 '호출'을 기다린다"고 했다.

내년에 정부가 쓸 예산은 약 340조원이다. 우리나라 국내총생산(GDP)의 3분의 1에 육박한다. 이 돈을 어디에, 어떻게 쓸지 최종적으로 손질하는 곳이 바로 기획재정부(기재부) 예산실이다. 각 정부 부처와 그 산하기관들은 내년에 쓸 돈을 확보하기 위해 이곳을 드나들며 칼질하려는 예산당국과 밀고 당기는 치열한 '전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최근 무상보육 예산이나 인천공항 지분 매각 논란이 부각된 것도 기재부가 이달부터 예산 심의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특히 올해는 예산당국이 2013년 균형재정(재정수입과 지출이 같아 적자가 없는 상태)을 목표로 세워, 정부 부처와 산하기관들이 전에 없이 허리띠를 졸라매야 할 형편이다. 정부 안팎에선 벌써부터 "예산 쟁탈전이 어느 해보다 뜨거울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예산당국이 부처별 예산 한도를 미리 정해주고, 사업비가 500억원 이상인 사업은 미리 정부 심사(예비타당성 조사)를 받도록 해 요즘 예산실 민원은 그나마 줄어든 편이다. 그래도 예산실의 과장급 이상 간부들은 많게는 하루 100명 이상의 내방객을 상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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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퍼 갑(甲)' 예산실, 남모를 고충도

돈 쓰는 모든 정부 사업을 결정하는 기재부 예산실은 정부 내에서도 '수퍼 갑(甲)'이다. 공무원 인사권을 쥐고 있어 정부 내에서 가장 '힘이 세다'는 행정안전부도 예산실 앞에서는 꼬리를 내린다. 행안부가 에너지 절약을 위해 실시 중인 정부청사 하절기 냉방 중지도 예산실에는 해당이 없다. "방문객이 많아 일정한 수준의 냉방을 저녁 때까지 해준다"는 게 정부 관계자의 얘기다. 정부 부처 엘리베이터는 원래 4층까지는 서지 않고, 5층부터 선다. 역시 에너지 절약을 위해서다. 그러나 기재부 4층에 예산실이 자리 잡은 2008년부터 엘리베이터는 4층에서 멈추기 시작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예산실에는 "민간 출신 경제부처 장관이 예산실(구 기획예산처) 7급 주사에게 불려왔다더라" "국방부 간부가 권총을 들고 와 예산 안 주면 두고 보자며 엄포를 놨다더라"는 일화가 전설처럼 떠돌았다.

예산실 출신의 정부 고위관계자는 "예산실장 시절 하루에 전국 15개 시도지사에게 모두 청탁 전화를 받은 적도 있었다"고 했다. 다른 예산실 출신 정치인 B씨는 "모시던 예산실 간부가 부모상을 당해 고향인 모 지방 대도시에서 상을 치렀는데, 그 도시의 꽃집에서 파는 조의용 화환이 바닥나 이름표만 떼고 재활용하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당시 부의금을 내려는 줄이 100m 이상 늘어섰었다"고 했다.

하지만 이런 수퍼 갑도 애로는 있다. 예산 심의가 시작되면 직원들은 주말도 없이 새우잠을 자면서 일해야 한다. 단기간에 방대한 업무를 처리하다 보니 업무량이 극도로 많아지기 때문이다. 기재부 2차관 출신 류성걸 새누리당 의원은 2008년 예산 편성 과정에서 과로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한 적도 있다.

지난 3일 기재부 발표에 따르면 올해 각 부처와 산하기관은 총 346조6000억원의 예산·기금 지출이 필요하다고 예산실에 요청했다. 예산당국은 7월 말까지 1차 심사를 통해 당초 의도한 예산 규모인 341조원 수준으로 깎아낼 계획이다. 전체 예산 심의는 8월 말에나 끝나고, 국민들에게 결과가 공개되는 것은 9월 말이다. 이 과정에서 사병 월급 인상 여부 결정, 무상보육 대상과 보육비 지자체 부담 문제 조정, 4대 연금 지출 규모 조정 등 굵직한 정책 현안도 가닥을 잡게 된다.〈그래픽 참조〉 국민의 세금이 새는 것을 막기 위한 보이지 않는 전쟁이 지금 진행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