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반기 영업을 끝내고 하반기를 맞은 시중은행 행장들이 한목소리로 리스크 관리 강화를 들고 나와 산업계를 긴장시키고 있다.

유럽발 금융 불안, 글로벌 경기 침체 여파로 우리나라도 경기 둔화 가능성이 커진 만큼 하반기엔 대출금 연체 관리 강화 등 한층 보수적 경영을 해 나가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이다. 은행 입장에선 당연한 얘기지만, 기업과 가계 입장에선 은행들이 신규 대출을 조이거나 부실 우려가 있는 대출을 회수하면 자금난이 한층 가중될 수 있어 벌써부터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다.

은행장들, "리스크 관리 최우선"

민병덕 국민은행장은 지난 3일 하반기 첫 월례조회에서 "리스크에 기반해 우량 여신과 비우량 여신에 대한 가격을 차별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신규 대출 심사나 만기가 된 대출의 연장 심사를 보다 깐깐하게 하고, 대출자의 신용에 따라 대출 규모와 금리, 상환 방법을 한층 더 차별화하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김종준 하나은행장도 7월 조회사에서 "가계 대출 연체가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만큼 대책을 면밀히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은행장들은 리스크 관리를 강화해야 하는 이유로 가계 부채와 글로벌 경기 둔화를 공통적으로 꼽는다. 민 행장은 "대규모 가계 부채가 경기 침체와 맞물리고 있고, (이자만 내면 되는) 거치 기간이 끝나고 원리금 상환 부담이 커지는 대출이 많아져 부실 우려가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신한은행 서진원 행장은 "유럽 위기의 근본적인 해결책 마련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고, 글로벌 경기 침체가 장기화하는 국면에 접어들었다"고 진단했다.

최근 은행들의 경영지표를 보면 은행장들이 몸을 사릴 만한 적신호가 이미 여기저기서 켜지고 있다. 5월 말 현재 은행권의 전체 대출 연체율은 1.37%로 지난해 말(0.89%)보다 0.5%포인트 가까이 올랐다.

금융정보업체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KB·신한·우리·하나 등 4대 금융지주와 기업·외환은행 등 6개 금융사의 상반기 순이익 추정치는 6조8000억원에 그쳤다. 이는 지난해 상반기 순이익 7조9541억원보다 14.6% 줄어든 것이다.

하반기 전망도 밝지 않다. 부동산 경기 침체가 악화돼 앞으로 주택 가격이 크게 떨어지면 은행 등이 떠안게 될 부실 채권이 13조~22조원대에 달하는 것으로 금융감독원은 추정하고 있다.

◇산업계 "비 올 때 우산 뺏겠다는 예고냐" 걱정

은행들은 '리스크 관리 강화'라는 표현을 쓰고 있지만, 기업들은 "비 올 때 우산을 뺏겠다는 얘기 아니냐"며 우려를 표시하고 있다.

A건설사 회계 담당 임원은 "주택 경기 불황으로 신규 사업으로 들어오는 돈은 거의 없는데, 은행에서 대출금 상환 압박까지 들어오니까 정신이 없다"며 "건설업계가 어려운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상황인데, 이런 식으로 금융권에서 압박이 들어오면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한 조선업계 관계자는 "회사 경쟁력이 떨어져서가 아니라 유럽 경제 등 전반적인 시황이 좋지 않아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이럴 때는 오히려 정책적으로 선박금융 등을 늘려줘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은행들이 대출 기간을 연장해 주지 않고 대출금 상환을 압박하는 리스크 관리에만 집중한다면 한 기업만 죽이는 게 아니라 국가 경제 전체를 망가뜨리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말했다.

은행권의 리스크 관리 강화는 특히 중소기업에 악재로 작용한다. 3일 중소기업중앙회가 중소 제조업체 151개를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 기업의 39.9%가 "자금 조달 사정이 지난해와 비교해 더 곤란해졌다"고 답했다. "자금 사정이 원활해졌다"는 기업은 17.6%에 불과했다. 특히 규모가 작은 기업일수록 자금 사정에 더 어려움을 겪고 있다. 종업원 수 20인 미만인 소기업에서는 "곤란해졌다"고 응답한 업체가 45.6%로 20인 이상 기업(31.0%)보다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