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재정위기 여파로 국내 경기가 둔화하면서 은행과 카드사 등 금융권 연체율에 비상등이 켜졌다. 경기 둔화로 국민의 실질 소득이 줄면서 은행이나 카드회사에서 돈을 빌리고도 이를 제때 갚지 못하는 사람이 느는 것이다. 특히 서민 가계, 생계형 자영업자 등 취약층의 연체율 급등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 은행에 이어 카드까지 연체율 급등

은행의 가계대출 연체율은 빠르게 늘고 있다. 4월말 기준 은행 연체율은 0.89%로 최근 5년 2개월 만에 최고치다. 주택담보대출 연체율은 5개월 연속 오르면서 0.79%를 기록해 2006년 10월(0.94%)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이다.

주택담보대출 연체율은 아파트 중도금 등 집단대출(일정한 자격을 갖춘 사람에게 개별심사 없이 일괄적으로 이뤄지는 대출) 연체율이 늘면서 급증하는 추세다. 입주 시점의 아파트 시세가 분양가보다 낮고 도로 등 기반시설이 잘 갖춰지지 않자 중도금·잔금 납부를 거부하며 소송을 진행하는 단지가 늘었기 때문이다.

은행 대출 뿐만 아니라 신용카드로 물건을 사거나 카드회사에서 돈을 빌리고 이를 갚지 않는 사람도 늘었다. 은행의 대출 문턱이 높아지면서 서민들이 2금융권이나 대부업체의 고금리 대출로 몰리는 이른바 ‘풍선효과’가 한몫하고 있다.

10일 금융감독원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3월말 기준 전업카드사(비씨·신한·삼성·현대·롯데·하나SK)의 총 채권 연체율은 2.09%로 2009년말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2년3개월래 최고치다. 신용카드 판매(고객이 신용카드로 결제하는 것) 연체율과 카드대출 연체율을 합한 연체율도 1.74%로 역시 2년3개월래 가장 높은 수치를 나타냈다.

◆ 실질 소득 감소로 서민·자영업자 부실 우려

금융권 연체율이 늘어난 것은 대출금을 갚지 못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는 뜻이다. 특히 신용등급이 안 좋을수록 다중채무자가 많기 때문에 금융권 연체율이 늘어날수록 저소득층 가계의 부실 우려도 커지고 있다. 또 베이비붐 세대의 본격적인 은퇴로 생계형 자영업자가 크게 늘고 있지만 내수 경기 침체로 1년도 못돼 폐업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신용평가사 코리아크레딧뷰로(KCB)에 따르면 지난해 9월말 기준 신용등급별 다중채무자 비중은 1~4등급이 5% 이하, 5~6등급 15~20%, 7등급이 30%였다.

금융권 연체율이 늘어난 이유는 집값 하락으로 소송이 늘었고 경기 둔화로 실질 소득 증가율이 거의 ‘제로(0)’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저축은행 등이 영업정지 되면서 저소득층이 카드업계로 몰린 것도 영향을 미쳤다.

올 1분기(1~3월) 실질 국민총소득(GNI)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0.2% 늘어나는데 그쳤다. 이는 1년 만에 최저치다. 실질 GNI는 우리나라 국민이 국내외에서 생산 활동으로 번 소득의 실질 구매력을 나타내는 지표다. 이 지표가 하락했다는 것은 그만큼 체감경기와 살림살이가 팍팍해졌다는 뜻이다.

◆ 당분간 해결책 없어 더 막막

금융권 연체율 급증의 더 큰 문제는 이런 사정이 짧은 시간에 좋아지기 어렵다는 것이다.

은행 가계대출 연체율을 높이는 주범인 계약해제 집단 소송은 최대 수년간 이어질 수 있다. 카드 대출도 지금은 전체 가계부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4% 미만으로 작지만 은행 대출 문턱이 높아지면 서민들이 언제든 카드대출로 옮겨탈 수 있어 추가 부실 가능성이 큰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금융당국이 은행 대출을 억제하면서 2금융권과 대부업체 뿐만 아니라 불법사금융으로 내몰리는 서민들이 크게 늘어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유로존 위기로 국내 경기가 상당기간 어려울 것으로 예상되는 것도 금융권 연체율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정부는 올해 하반기 경제운용방향에서 당초 올해 성장률 전망치인 3.7%를 하향 조정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부동산 경기 침체로 관련 산업이 여전히 어렵고 유럽 지역이 불안한 가운데 중국마저 경기 둔화 움직임을 보이기 때문이다. 성장 둔화는 일자리 감소, 소비 위축, 소득 감소 등 악순환의 출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