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용규씨

'구리왕' 차용규(56)씨가 역외(域外)탈세혐의로 1600억원대의 세금을 부과하려던 국세청과의 조세 다툼에서 이겨 세금을 한 푼도 내지 않게 됐다. 국세청의 세금부과 방침에 반발해 차씨가 과세전(前) 적부심(용어설명 참고)을 신청했는데, 최근 열린 과세전 적부심사위원회에서 위원들이 차씨의 손을 들어줬다. 국세청은 지난해 역외 탈세 조사에 최대 역점을 두고, '선박왕' 권혁(62) 시도상선 회장에 이어 차씨에게 거액의 세금을 추징하려 했으나 첫 단추부터 암초에 부딪힌 것이다. 특히 국세청 자체 기구인 과세전 적부심사위원회 멤버 11명 중 국세청 직원 5명을 제외한 외부위원 6명 전원이 국세청 과세 내용이 부당하다고 판정, 국세청의 조사가 허술했던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차씨는 국내 거주자 아니어서 세금부과대상 아니다"

공방의 핵심은 해외에 주로 사는 차씨가 세금부과 대상인 한국 '거주자'인지 여부였다. 국세청은 차씨가 조세피난처인 라부안에 둔 회사 등을 통해 국내 부동산과 주식 등에 4000억원 안팎을 투자했고, 부인이 한국에 자주 드나든 점 등을 들어 한국 거주자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차씨는 주로 홍콩영국을 오가며 살고, 한국에는 1년에 한 달 정도만 머물렀다는 점을 주장하며 한국 거주자가 아니라고 맞섰다.

소득세법상 국내 거주자는 '국내에 거소(居所)를 두거나 1년 이상 거소를 둔 개인'으로 규정하지만, 시행령에는 해외에 살더라도 가족이나 재산 등 실질적인 생활근거가 한국에 있으면 거주자로 간주해 세금을 매길 수 있다. 하지만 과세전 적부심사위원회는 "차씨의 국내 거주일수 등을 감안할 때 차씨는 한국 거주자로 볼 수 없고 따라서 세금 부과는 부당하다"고 판단했다. 국세청은 이번 결정을 받아들여 차씨에 대한 세금부과를 포기할 것으로 알려졌다.

국세청, 선박왕 권혁 회장 과세엔 문제없다고 판단

이번 결정은 권혁 회장과의 소송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쟁점이 차용규씨와 마찬가지로 한국 거주자로 보느냐이기 때문이다. 국세청은 그러나 권혁 회장의 경우 국내에서 1년에 6개월 가까이 살며 실질적인 경영 활동을 해 왔기 때문에 차씨와는 다르다는 입장이다. 권 회장은 과세 전 적부심을 신청하지 않고 세금을 부과받은 뒤에야 조세심판원에 불복 청구를 했으며, 지난달 조세심판원은 기각 판정을 내렸다. 그러나 권 회장은 소송을 제기할 계획이다.

차씨는 1983년 삼성물산에 입사한 샐러리맨 출신으로, 카자흐스탄 최대 구리 채광·제련업체인 카작무스 위탁경영을 하면서 거부(巨富)가 돼 샐러리맨의 신화를 이룬 인물이다. 1995년 부도 직전에 몰린 카작무스에 대한 위탁경영을 시작했다. 그는 적자기업 카작무스를 2년 만에 흑자로 돌려놓았다. 2004년 삼성물산이 카작무스에서 철수하자 그 지분을 사들여 2005년 런던 증권거래소에 상장시킨 뒤 자신의 지분을 팔아 1조원대의 차익을 남겼다.

☞과세 전(前) 적부심

국세청이 세무조사를 마친 뒤 세금을 고지하기 전에 납세자에게 과세 내용을 미리 알리고, 납세자가 억울하다고 판단하면 이의를 제기하도록 하는 납세자 구제 절차이다. 세금이 고지된 후에도 납세자는 조세심판원에 '세금 불복 청구'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