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FTA(자유무역협정)가 국회 비준을 받고 난 뒤에도 괴담과 억측은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온갖 억측의 공통점은 한·미 FTA가 한·EU FTA와 비교해도 불평등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저작권 보호, 쇠고기·닭고기·삼겹살 등 축산품, 컬러TV, 자동차 등 주요 공산품의 개방 정도는 한·미 FTA와 한·EU FTA가 거의 같다. 위성통신·환경 등 일부 서비스 분야에선 한·EU FTA가 한·미 FTA보다 개방 폭이 오히려 더 크다.

시민단체들이 한·미 FTA의 대표적인 독소조항이라고 거론하는 항목들도 뜯어보면 한·EU FTA의 관련 내용과 별반 차이가 없다. 김형주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한·EU FTA는 한·미 FTA와 같은 수준으로 해야 한다는 전제를 가지고 협상을 시작했기 때문에 수준이 거의 똑같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결국 한·EU FTA 때는 별 이의를 제기하지 않던 사람들이 한·미 FTA를 극렬하게 반대하는 이유는 그 기저에 '반미(反美)' 이념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는 전문가가 적지 않다. 주요 쟁점별로 양 협정 내용을 비교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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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 부문, 양 협정 내용 똑같다

한·미 FTA와 한·EU FTA는 금융 부분 협정 내용에 차이가 없다. 양 협정 모두 수출입은행, 기업은행 등 국책 금융기관을 협정의 예외로 인정했다. 국가가 국책 금융기관이 발행한 채권에 계속 지급보증을 할 수 있으며 외국인 지분제한도 둘 수 있다. 또 상대국이 새로운 금융서비스를 출시할 때 이 서비스가 한국에 없다면 우리 정부가 '엄격한 조건을 두고' 허용할 수 있다는 것도 내용이 같다.

◇한·미 FTA는 개성공단 제품 한국산 인정 안 한다?

야당과 시민단체들은 한·EU FTA에선 북한 개성공단 제조상품이 한국산으로 인정받아 관세 혜택을 받지만 한·미 FTA는 이 조치가 무한정 늦어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한·미와 한·EU FTA 모두 "협정 발효 1년 후 한반도역외가공위원회를 구성해 세부사항을 논의한다"고 명시돼 있다. 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개성공단 제품에 대해 관세 인하 여부를 확정하겠다는 것이다. 정부는 "한·EU FTA 협상을 할 때 한·미 FTA 문안을 양측이 보면서 이 정도 수준으로 하자고 결정한 것"이라며 "항간에 떠도는 소문은 잘못된 사실이다"고 잘라 말했다.

FTA 반발하는 농민들 - 25일 전국농민회총연맹 광주시지회 소속 농민들이 광주광역시 광산구 운남동 민주당 김동철 의원 사무실 앞에서 한·미 FTA 국회비준을 단독처리한 한나라당과 이를 막지 못한 민주당을 비난하며 나락을 태우고 있다.

◇역진(逆進)방지 조항 논란은 허상

시민단체는 한·EU FTA에는 없고, 한·미 FTA에만 있는 역진 방지 조항을 두고 '불평등' 문제를 지적한다. 하지만, 역진방지 조항의 적용은 한·미 FTA가 개방하지 않을 것만 명기하고 나머지는 모두 개방하는 방식(네거티브 리스트)을 채택한 데 따른 것이다. 한·EU FTA에선 반대로 개방할 부문만 명시하고 나머지는 개방하지 않는 방식(포지티브 리스트)을 택했다.

통상협정에서 역진방지 조항은 네거티브 리스트와 한 묶음으로 처리되는 사항이다. 이 방식이 더 포괄적인 개방을 규정하고 있는 만큼 상황이 악화될 경우 상대방이 이를 되돌리고(역진) 싶은 유혹도 더 크기 때문에 이를 방지하기 위한 안전장치인 셈이다.

전문가들은 역진방지 조항이 반드시 한국에 불리한 게 아니라고 설명한다. 장애인 복지·국민건강보험·농어촌 지원 등 국민의 생활과 직결되는 44개 주요 분야에 대해선 역진방지 조항이 적용되지 않는다. 최원목 이화여대 교수는 "역진방지 조항으로 인해 정부는 향후 규제를 푸는 데 신중해질 수밖에 없어 외국 기업이 오히려 불리해질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