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헨리의 소설 '마지막 잎새'에서 늙은 화가는 병에 걸린 이웃집 처녀를 위해 목숨을 버려가며 담벼락에 담쟁이덩굴 잎 하나를 그렸다. 처녀는 비바람에도 끄떡 않는 잎을 보고 삶의 의욕을 되찾아 병에서 회복했다.

실제로 담쟁이덩굴이 사람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 이번엔 잎이 아니라 줄기다. 담쟁이덩굴 줄기가 벽을 타고 오를 때 분비하는 물질로 의료용 접착제를 만드는 연구가 국내외에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인체와 환경에 무해(無害)한 선크림으로도 쓸 수 있다. 이런 담쟁이덩굴을 둘러싼 미국독일, 한국의 연구 경쟁도 뜨겁다.

콘크리트 원리로 벽에 달라붙어

가을이 되면 벽에 가득했던 담쟁이덩굴의 잎이 떨어지면서 앙상한 줄기가 드러난다. 다른 식물과 달리 담쟁이덩굴은 줄기가 붙잡을 게 하나 없어도 벽을 타고 오른다. 독일 프라이부르크대 연구진은 지난해 5월 담쟁이덩굴이 콘크리트와 같은 원리로 벽에 달라붙는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담쟁이덩굴을 보면 줄기 끝에 청개구리 다리처럼 지름 3㎜의 동그란 원반이 7~10개씩 달렸다. 원반에서는 뿌리털이 나와 벽면의 미세한 홈에 들어간다. 연구진은 뿌리털이 고리처럼 홈 안쪽에 연결되며, 그 후 접착물질이 분비돼 홈을 완전히 메우는 사실을 밝혀냈다.

연구진은 "홈을 메운 접착물질 속 뿌리털이 콘크리트의 철근 역할을 해 줄기가 벽에 단단히 달라붙는다"며 "담쟁이덩굴 줄기를 잘라도 떨어지지 않고, 억지로 떼면 벽에 바른 회반죽까지 떨어져 나오는 이유가 그 때문"이라고 밝혔다.

접착물질의 힘은 미세 입자에서 나온다. 미국 테네시대 밍준 장(Zhang) 교수는 최근 담쟁이덩굴의 접착물질 안에 지름이 머리카락의 1000분의 1에 불과한 미세 입자들이 가득 들어 있는 것을 확인했다.

입자가 워낙 작다 보니 벽과 접촉 면적이 엄청나게 커져 접착력도 세진다. 종이를 붙일 때 풀을 몇 군데만 바르는 것보다 전체에 고루 바르면 더 단단하게 달라붙는 것과 같다. 장 교수는 "미세 입자 덕분에 담쟁이덩굴 줄기는 제 무게의 200만배나 강하게 벽을 붙잡을 수 있다"고 밝혔다.

기존 선크림보다 자외선 차단 능력 4배

담쟁이덩굴의 접착력은 의료계에서 먼저 활용할 수 있다. 이해신 KAIST 교수(화학과)는 "비를 맞아도 줄기는 그대로 벽에 달라붙어 있다"며 "수분이 많은 인체의 상처를 봉합하는 의료용 접착제로 최적 조건"이라고 말했다.

화장품으로도 활용이 가능하다. 테네시대 장 교수는 지난해 7월 담쟁이덩굴의 접착물질이 자외선으로부터 피부를 보호하는 능력이 기존 선크림의 4배나 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선크림에는 역시 지름이 머리카락의 1000분의 1에 불과한 산화티타늄이나 산화아연 입자들이 들어 있다. 이 미세 입자들이 자외선을 반사시킨다. 담쟁이덩굴의 접착물질에 들어 있는 미세 입자도 선크림의 광물 입자와 같은 역할을 한다.

장 교수는 "기존 선크림에 들어 있는 금속은 인체나 환경에 해를 끼칠 수 있지만 담쟁이덩굴의 접착물질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며 "담쟁이덩굴 접착물질로 만든 선크림은 접착력도 있어 물에 들어갔다 나와도 다시 바를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렇다고 아예 지워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해신 교수는 "선크림은 한 번 물에 들어가면 상당 부분 지워지지만 담쟁이덩굴 접착물질은 물에 몇번 들어갔다 와도 유지된다는 의미"라며 "일부러 씻으면 충분히 지울 수 있다"고 말했다.

국내에선 인공 합성 연구 중

국내에서는 이해신 교수팀이 담쟁이덩굴을 연구 중이다. 이 교수는 최근 담쟁이덩굴이 분비하는 접착물질의 화학구조를 처음으로 밝혀냈다. 접착물질은 전분처럼 당(糖)이 긴 사슬로 연결된 다당류와 단백질을 이루는 아미노산 3개를 합한 정도로 분자량이 작은 저분자 물질 두 종류로 이뤄져 있었다.

신기하게도 각각의 물질은 그 자체로는 접착력이 없지만 둘을 합치면 접착제가 됐다. 이 교수는 "지난 7월 미국에서 테네시대 장 교수를 만났는데 아직 접착물질의 정체를 밝혀내지 못했다고 들었다"며 "현재 담쟁이덩굴의 접착물질을 이루는 두 성분을 인공 합성해 정확한 메커니즘을 분석 중"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