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견기업 팀장인 김영민씨(40)는 2009년 집을 살 때 받은 주택담보대출을 이자만 내다가 만기 때 한꺼번에 원금을 갚는 변동금리·일시상환 방식에서 원리금을 함께 갚아 나가는 고정금리·분할상환 방식으로 바꾸려다 결국 포기했다. 아이 둘을 키우는 김씨의 연봉은 5000만원, 한 달 손에 쥐는 돈은 350만원 안팎이다. 현재 대출금은 2억원(만기 10년)이다.

은행에 문의한 결과 김씨가 현재의 대출을 고정금리·분할상환 방식으로 바꾸면 한 달 부담이 90만원대 초반(이자)에서 최소 230만원 이상(이자+원금)으로 뛴다. 김씨의 거래은행은 최근 고정금리 대출 이자를 5%대 초반으로 낮췄지만 원금상환 부담 탓에 이자를 내린 효과는 미미했다. 김씨는 "최근 정부에서 고정금리·분할상환 식으로 대출을 받으면 인센티브를 준다기에 알아봤는데 나로선 감당 못할 수준이었다"고 했다.

지난달 29일 정부가 내놓은 가계부채 대책에 대해 취지는 좋지만 현장의 문제를 간과해 실효가 의심스럽고 뜻하지 않은 피해자를 낳을 수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고정금리·분할상환 대출, 받을 수 있는 사람 없다?

앞서 김씨의 사례에서 보듯 중산층이 원금과 이자를 같이 갚아 나가는 대출 부담을 견디기는 극히 어렵다. 본지가 시중 A은행에 문의한 결과, 김씨처럼 만기를 10년으로 '짧게' 잡지 않더라도 2억원을 대출받을 때 고정금리로 원금과 이자를 함께 갚아나가려면 15년 만기일 때 월 150만원을 더 내야 하고, 30년을 만기로 잡아도 월 98만원을 더 내야 한다.

연봉이 5000만~7000만원인 중산층은 월소득이 300만~500만원에 불과한데 한 달 생활비의 절반 가까운 돈을 은행 대출을 갚는 데 써야 하는 셈이다. 만기를 30년으로 하면 대출 상환 부담이 다소 줄지만, 이는 민간 부문의 소비 여력을 장기적으로 떨어뜨리는 결과를 가져온다.

한 시중은행 상품담당 부행장은 "일부 은행에서 파격적인 조건에 고정금리·분할상환 대출 상품을 내놓고 있지만 문제는 이걸 살 능력이 되는 수요층이 있느냐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조건을 아무리 좋게 줘도 월 상환부담 때문에 '그림의 떡'이 될 소지가 다분하다"고도 했다.

◆대출서류 심사 강화, 은퇴자에 날벼락 될 수도

신규 대출자의 서류심사를 강화하겠다는 정부 방침에 대해서도 은행권에선 걱정이 많다. 은행들은 대출을 해줄 때 담보물건과 관계된 서류와 대출 희망자의 소득 증명을 요구한다. 그런데 이 절차를 까다롭게 하면 고정소득이 없는 사람, 즉 고령의 은퇴자들은 담보 가치가 있는 주택이 있어도 대출을 많이 받을 수 없다.

현재 총부채상환비율(DTI) 규제가 적용되는 강남 3구에선 10억원이 넘는 고가 주택을 가진 은퇴자라도 은행은 주택대출을 5000만원까지만 해준다. 정부 방침대로 서류심사를 깐깐하게 한다면 자칫 강남 3구는 물론 전국의 은퇴자들이 급한 필요가 있어도 집을 담보로 돈을 융통하는 길이 막힐 것이라는 게 은행 대출 담당자들의 의견이다.

◆주택담보대출, 생활비 궁한 서민들이 많이 받는데…

최근 주택담보대출이 늘어난 것은 새로 집을 사는 사람들이 늘었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가지고 있는 집을 담보로 생활자금이나 사업자금, 심지어 학자금을 융통해 쓰는 사람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라고 시중은행 대출 담당자들은 말했다. 따라서 주택담보대출 심사를 강화하는 이번 대책은 무리하게 대출받아 집을 사는 사람뿐 아니라 집을 내놓아야 할 만큼 절박한 처지에 있는 서민과 자영업자의 자금줄을 막아 사지로 내몰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A시중은행이 내부 기준에 따라 작년 7월 이후 신규 주택담보대출을 분류한 결과 약 60% 이상이 생활자금과 사업자금 용도로 대출된 것으로 집계됐다. 이 은행 부행장은 "부동산 시장이 침체되면서 아파트단지를 분양할 때 집행되는 집단대출이나 새로 집을 살 때 나가는 대출의 비중이 확 줄었다"고 말했다.

종로에 있는 B시중은행 지점장은 "서류심사의 문턱을 높이면 은퇴자는 물론 소득 증명이 어려운 영세 자영업자들도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며 "정부가 실행 방안을 좀 더 고민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금융감독원과 은행연합회, 시중은행들은 별도의 태스크포스(TF) 팀을 만들어 7월 중 세부적인 서류심사의 범위와 요건을 정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