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일 국회 지식경제위원회 김영환 위원장(민주당)은 기자회견에서 대기업을 향해 굉장한 강도의 거친 용어를 썼다. '인력 탈취' '납품가 후려치기' '악질행위' 같은 말들이었다. 거의 전례가 없는 수준이었다. 한나라당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 소장파 의원은 "무책임한 재벌들에 대해 칼날을 갈고 있다"고 했다. 민주당 손학규 대표, 한나라당 황우여 원내대표도 이날 작심한 듯 경제단체들을 비판했다. 정치권은 "이참에 대기업들을 손보겠다"는 분위기이고, 재계는 "당하고만 있지는 않겠다"는 자세다.

"재계 때리기는 민심 따른 것"

여야가 일제히 대기업 때리기에 나선 것은 전반적 여론을 고려할 때 절대 나쁠 게 없다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정치권은 지금 대기업과 각을 세우는 것이 내년 총선에서 표로 이어질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24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전경련·대한상의·한국경총·중소기업중앙회·무역협회 등 경제5단체장과 박재완 기획재정부 장관의 간담회가 열렸다. 박재완 장관(왼쪽 두 번째)이 발언을 한 뒤 인사를 하고 있다.

한나라당 소장파의 핵심 의원은 "서민이 표 찍지 재벌이 표 찍느냐"며 "지금 민심으로 보면 누가 더 재벌을 때리느냐에 따라 표가 나온다"고 했다. 또 다른 의원은 "박재완 기획재정부 장관 등 정부 관계자들이 대기업을 편드는 인상을 주는데 정신 나간 사람들"이라고 했다.

민주당 강봉균 의원은 "예전에 비해 서민층뿐 아니라 중산층까지 재벌에 대한 이미지가 아주 안 좋아졌다. (재벌 때리기로) 서민·중산층까지 포용할 수 있다"고 했다. 다른 고위당직자는 "정당이 선거 의식하지 않고 하는 행위가 있느냐"고 했다.

그동안 대기업이 보인 행태에 대해 쌓인 불만과 허창수 전경련 회장의 정치권 비판 발언에 대한 감정적 측면도 작용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한나라당 김성식 정책위 부의장은 "그동안 각종 특혜만 입고 일자리도 늘리지 않던 대기업이 세금 더 안 깎아준다고 정치권에 먼저 싸움을 걸었다"고 했다. 정태근 의원은 "정부가 재벌 견제를 못 하니 국회라도 나서서 견제하는 것"이라고 했다.

민주당 중진 의원도 "재벌들이 정치권을 마치 도둑놈 취급하듯이 나무라느냐"고 했고, 다른 의원도 "허 회장이 너무 자극적인 언사로 정치권을 긁었다"고 했다.

재계 "대한민국이 사회주의 국가냐"

전경련을 비롯한 재계는 정치권의 공격을 부담스러워하면서도 부글부글 끓고 있다.

허 회장의 전경련 기자간담회 때 참석했던 한 재계 관계자는 "허 회장이 정부 정책을 전반적으로 높게 평가하며 일부 우려되는 사안들을 겸허하게 전달했을 뿐, 정부와 정치권을 깎아내리는 의도와 발언은 전혀 없었다"면서 "그런데도 정치권에서 재계의 대표를 오라가라하는 것은 너무한 것 아니냐"고 말했다.

다른 재계 관계자는 "잭웰치 전(前) GE 회장이 인터뷰에서 오바마 미국 대통령을 대놓고 '사회주의자'라고 비판해도 미국 정치권에서 그를 손보겠다고 나서지 않았다"면서 "허 회장 발언 정도의 말도 못한다면 우리나라야말로 사회주의 국가가 아니냐"고 말했다. 전경련 관계자는 "국회가 열려는 공청회의 주제가 전문적이어서 허 회장보다는 실무진이 참석하는 게 맞다"고 말했다.

장훈 중앙대 교수는 "내년 선거를 앞둔 정치권은 대기업에 대한 여론이 호의적이지 않다는 점을 의식, 기업 때리기에 나선 측면이 있다"며 "재계 또한 대기업에 대한 국민의 불신이 크다는 걸 알아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