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김정백(36)씨는 최근 회사 근처 편의점에서 속 쓰린 경험을 했다. 함께 점심을 먹은 직장 동료에게 "시원한 걸로 입가심이나 하자"고 한 김씨는 콘 아이스크림 4개를 사면서 8000원을 썼다. 그는 "작년 여름엔 하나에 700원이었던 것 같은데 가격이 너무 올랐다"고 했다. 며칠 뒤 집 근처 대형마트에 장을 보러 간 김씨는 똑같은 아이스크림이 하나에 1200원에 팔리는 것을 발견했다. 김씨는 "진짜 가격이 얼마인지 궁금하다"고 말했다.

김씨가 산 아이스크림 가격은 2000원도 맞고 1200원도 맞다. 작년 7월 1일부터 아이스크림·빙과류·과자·라면 등 가공식품 4종에 확대 시행된 '오픈 프라이스(open price)' 때문이다. 오픈 프라이스는 제조업체가 표시하던 '권장소비자가격'을 없애고 유통업체가 상품의 판매가격을 결정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판매점들의 가격 경쟁을 촉진해 제품 가격을 안정시키기 위한 제도이다.

판매점 가격 경쟁 대신 소비자 부담만 늘어

실제는 어떠했을까. 가공식품에 대한 오픈 프라이스 도입 1년 만에 과자·아이스크림 등 서민 생활에 밀접한 먹을거리 가격이 대부분 크게 올랐다. 유통업체들의 가격 경쟁으로 주요 먹을거리를 더 싼값에 살 수 있다는 당초 취지와 달리 소비자들의 부담은 오히려 늘어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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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소비자원이 운영하는 생필품 가격정보 사이트 '티프라이스(T-Price)'에 따르면, 작년 7월 농심 새우깡 1봉지(90g)는 평균 567원(대형마트)~800원(편의점)에 팔렸다. 그러나 6월 현재 새우깡 평균 가격은 658원(대형마트)~900원(편의점)으로 올랐다. 할인 행사가 거의 없는 편의점에서 평균 100원이 올랐고 대형마트(91원)와 백화점(94원)의 가격 인상 폭도 비슷했다. 가격 인상엔 제품 출고가가 오른 이유도 있다. 농심은 지난 5월 새우깡 출고가격을 7.7% 올렸다. 그러나 유통업체의 판매가격은 출고가 인상률을 뛰어넘었다. 유통업체별 새우깡 가격 인상률은 대형마트 16.0%, 백화점 13.2%, 편의점 12.5%, SSM(기업형 수퍼마켓) 10.4% 등으로 나타났다.

롯데 자일리톨 오리지날(90g)은 작년 7월과 비교해 대형마트 78원(3508원→3586원), 백화점 220원(3633원→3853원), SSM 243원(3737원→3980원)씩 평균 가격이 올랐다. 농심 신라면(5개·2900~3650원), 오리온 초코파이(18개·3600~4800원)는 지난 1년간 가격 변화가 거의 없었다. 오픈 프라이스 제도 아래 판매점의 가격 경쟁으로 소비자가 이득을 본 경우는 거의 없는 셈이다.

제조·유통업체는 서로 '남 탓'

오픈 프라이스 이후 가격 상승에 대해 유통업체와 제조업체는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있다. 유통업체는 "어떻게든 가격을 낮추고 싶은데 제조업체 때문에 하지 못한다"는 입장이다. 한 대형마트 관계자는 "브랜드 인지도가 높고 소비자들이 많이 찾는 '1등 제품'은 제조사의 눈치를 보면서 가격을 책정한다"고 말했다.

제조업체들은 "유통업체가 마진을 챙기면서 왜 남의 탓"이냐며 발끈하는 분위기다. 한 식품회사 관계자는 "가격 결정권은 이미 유통업체에 넘어갔다. 현장 판매점에서 가격을 올리는데 소비자의 비난은 제조업체로 쏟아져 곤혹스럽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가공식품의 오픈 프라이스 제도는 아직 과도기에 있다고 진단한다. 한국소비자원 이기헌 박사는 "동네 수퍼마켓 같은 영세업체는 아직 가격 결정권이 없고 대형 유통업체는 제조업체와 힘의 균형을 찾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제조업체, 유통업체 신경전에 소비자만 골탕 먹는 셈이다.

식품 가격이 상대적으로 저렴하기 때문에 오픈 프라이스의 효과가 미미하다는 분석도 있다. 연세대 오세조교수(경영학과)는 "대형 가전제품은 업체별로 10만원 이상 차이가 날 수 있지만, 과자나 아이스크림은 몇 백원 정도의 가격 차이가 민감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가전제품 시장엔 오픈 프라이스 정착

오픈 프라이스 도입으로 소비자가 실질적인 이득을 본 대표적인 품목이 바로 가전제품이다. 1990년대 말까지 가전제품의 가격 결정권은 삼성, LG 등 제조업체 쪽에 있었고, 소비자 '선택의 폭'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그러나 1999년 TV·VCR·오디오·세탁기·유선전화기 등 가전제품 5개 품목에 오픈 프라이스가 적용되면서 시장 판도가 요동쳤다. 하이마트·전자랜드 등 전자제품 양판점과 대형마트들이 대량 구매와 낮은 마진율로 기존 대리점보다 훨씬 낮은 판매가격으로 시장을 공략했다. 실제로 하이마트는 오픈 프라이스 첫해인 1999년 680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가 2000년엔 1조2000억원으로 76%나 성장했다.

작년 7월 사실상 전 품목에 오픈 프라이스가 시행된 의류 시장엔 여전히 '○○% 할인' 등의 광고가 성행하고 있다. 한 의류 판매업자는 "소비자들은 20만원짜리를 50% 할인해 10만원에 사가는 것을 훨씬 좋아한다"고 말했다.

☞오픈 프라이스(open price)

제조업체가 '권장 소비자 가격' 등을 생산 제품에 표시하지 못하게 하고, 유통업체가 판매가격을 결정해 매장에서 가격을 표시하는 제도. 가격 경쟁을 촉진시켜 제품 가격을 안정시키기 위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