뻐꾸기는 작은 새의 둥지에 알을 낳고 도망간다. 작은 새는 자기보다 몸집이 훨씬 큰 뻐꾸기 새끼를 제 자식인 줄 알고 온갖 정성을 다해 키운다. 미생물 세계에도 뻐꾸기 같은 존재가 있다. 바이러스인 '박테리오파지(bacteriophage)'는 알 대신 DNA를 세균에 집어넣는다. 세균은 자신의 것인 양 박테리오파지의 DNA를 복제해준다.

독일에서 12일까지 35명의 사망자를 낸 식중독 사건은 맹독성 대장균이 원인이었다. 과학자들은 대장균이 독성을 갖게 된 것이 박테리오파지 때문으로 보고 있다. 한편에서는 '꿩 잡는 게 매'라고 항생제도 듣지 않는 대장균을 없애려면 박테리오파지를 써야 한다고 주장한다. 병도 주고 약도 주는 두 얼굴의 바이러스다.

◆식중독 독소는 바이러스에서 비롯돼

박테리오파지는 '세균(bacteria)을 잡아먹는다(phage)'는 뜻으로 붙인 이름이다. 생김새는 각진 몸통에 가는 다리가 나 있는 게 달착륙선과 비슷하다. 세균에 달라붙은 박테리오파지는 표면을 뚫고 자신의 DNA를 주입한다. DNA는 세균의 복제효소를 이용해 유전자와 몸통 단백질을 복제한다. 수많은 개체로 불어난 박테리오파지는 결국 세균을 터뜨리고 밖으로 나와 다른 먹잇감을 찾아 떠난다.

원통형의 대장균(황색) 표면에 달라붙은 박테리오파지들(파란색). 전자현미경으로 찍은 사진이다.

독일에서 발견된 맹독성 대장균은 'O104:H4' 종이다. 인체에 들어가면 치명적 독소(毒素)인 '시가(Shiga)'를 분비해 장 출혈을 일으키고 콩팥 기능을 망가뜨려 심한 경우 사망에까지 이르게 한다.

시가 독소는 1897년 일본 과학자 시가 기요시가 처음 발견했다. 시가 독소를 내는 이질균 시겔라(Shigella)도 시가 박사의 이름을 딴 것이다. 영국 리버풀대의 미생물학자 히더 앨리슨(Allison)은 지난 9일 국제학술지 '네이처'에 "당시 박테리오파지가 시겔라에 침입했다가 시가 독소 유전자를 얻었으며, 1980년대 이후 대장균을 비롯한 다른 세균에도 퍼뜨렸다"고 밝혔다. 영국 리버풀대의 데이비스 애치슨(Acheson) 교수는 1990년대 실험실에서 박테리오파지의 시가 독소 유전자가 대장균에게 전달되는 것을 확인했다.

서울대 천종식 교수(생명과학부)는 "베이징 게놈연구소가 해독한 O104:H4 대장균의 게놈(유전체)을 분석했더니 12~15년 전 중앙아프리카 설사 환자에게서 발견된 대장균과 99.7% 같았다"며 "차이가 있다면 독일 대장균에는 박테리오파지로부터 온 독소를 만드는 유전자가 여러 개 더 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세균은 주변의 다른 세균으로부터 유전자를 받아들이는데, 독일 대장균은 이런 능력도 아프리카 대장균에 비해 뛰어난 것으로 확인됐다. 그 결과 독성이 더 강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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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독성 대장균에 항생제를 쓰지 않는 이유도 박테리오파지 때문이다. 항생제가 들어가면 대장균에선 손상된 DNA를 고치는 활동이 급격히 늘어난다. 덩달아 박테리오파지 복제도 폭발적으로 늘어나, 나중에 대장균을 뚫고 박테리오파지가 나오면서 시가 독소 역시 퍼진다는 것.

◆맹독성 대장균 막을 대안도 바이러스

하지만 대안도 역시 박테리오파지다. 캐나다 구엘프대의 키스 워리너(Warriner) 교수는 지난 8일 '사이언스'지에 독일에서 발견된 맹독성 대장균을 박테리오파지로 막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대장균을 옮기는 주범으로 꼽힌 채소에 독소가 없는 박테리오파지와 함께 무해한 세균을 함께 뿌리는 방법을 제안했다. 세균은 박테리오파지를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박테리오파지로 세균을 퇴치하는 방법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서구에서는 곰팡이로부터 유래한 항생제가 개발되면서 사라졌지만, 구소련에서는 계속해서 세균을 잡는 데 박테리오파지를 썼다.

항생제가 듣지 않는 세균들이 늘어나자 서구에서도 박테리오파지가 새삼 주목받고 있다. 영국의 한 기업은 세균의 독소 유전자와 항생제 내성 유전자를 차단하는 단백질을 만드는 박테리오파지를 시험 중이다. 이미 2002년 미 국립보건원(NIH)에서는 식중독균의 하나인 쥐 티푸스균에 감염된 생쥐를 박테리오파지로 치료했으며, 2007년 영국 생거연구소도 결장염균에 감염된 생쥐를 역시 박테리오파지로 완치한 바 있다.

하지만 서울대 의대 용동은 교수(진단검사의학과)는 "인체 내부에서 박테리오파지의 안전성에 대해서는 검증할 자료가 없는 상황"이라며 "미 식품의약국(FDA)은 채소 등에는 박테리오파지를 쓰는 것을 허용했지만, 아직 사람에 대해선 승인을 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