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년 전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에서는 대머리 연구원들이 수난을 당하는 일이 일어났다. 임시직 연구원으로 있던 한 박사과정 대학원생이 대머리 연구원만 만나면 얼마 남지 않은 머리카락을 달라고 졸랐다. 그것도 모자라 자녀들의 머리카락까지 가져다 달라고 했다. KIST의 이발소는 그 학생의 아지트나 마찬가지였다. KIST 생체분자기능연구센터 최만호(43) 박사 이야기다.
"인체 내부의 대사 작용을 조절하는 스테로이드 호르몬이 박사 학위 주제였어요. 어느 날 TV에서 탈모(脫毛)가 호르몬 변화로 일어난다는 뉴스를 보고 이거다 싶었지요."
최 박사는 당장 실험실로 돌아가 탈모 환자의 혈액과 소변에서 호르몬양의 변화를 시험했다. 그런데 환자와 정상인의 호르몬 수치가 별 차이가 없었다. 그래서 '머리가 빠지는 것이니 머리카락을 분석하면 좀 다르지 않을까' 생각했다. KIST 내 대머리 연구원들의 수난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그때까지 남성호르몬에서 비롯된 물질이 모근(毛根)을 위축시켜 탈모를 일으킨다고 알려졌었다. 지금 나오는 탈모 치료제도 모두 그 물질을 차단하는 원리다. 하지만 최 박사는 탈모 환자와 정상인의 머리카락에서 해당 물질의 농도 차이가 크지 않음을 밝혀냈다. 오히려 다른 호르몬이 큰 차이를 보였다. 최 박사는 이 호르몬을 차단하는 새로운 탈모 치료물질을 개발, 특허를 출원했다. 현재는 기능성 화장품과 신약으로 개발 중이다.
최 박사가 찾은 탈모 유발 호르몬은 탈모 환자의 자녀에게서도 많이 나타났다. 어릴 때 탈모를 예측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여성 탈모의 원인이 남성과 다르다는 사실도 처음으로 알아냈다.
최 박사는 그 뒤에도 환자의 머리카락을 수집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호르몬은 인체의 모든 질병과 관련이 있습니다. 머리카락 한 올로 질병을 손쉽게 진단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최 박사의 예측은 맞았다. 병원에서는 혈액과 소변으로 질병을 검사한다. 하지만 혈액 채취는 환자에게 불편하기도 하지만 보관도 어렵다.
소변은 그날 먹은 음식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 이에 비해 머리카락은 쉽게 채취해 실온에서 보관해도 된다. 머리카락에는 모근을 지나는 혈관에서 온 물질이 들어 있다. 혈액을 분석하는 효과가 있는 것이다.
게다가 머리카락은 한 달에 일정한 길이로 자라기 때문에 머리카락 한 올이면 몇 개월 동안의 인체 변화를 보여줄 수 있다. 마약 수사에서 머리카락을 분석해 다섯 달 전에 마약을 복용한 사실까지 밝혀내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의 목표는 당장 병원에서 쓸 수 있는 진단법이다. 인체에는 250여종의 스테로이드 호르몬이 있다. 최 박사는 이 중 180종을 한 번에 분석할 수 있게 했다. 외국에선 기껏해야 10여종을 한 번에 분석한다. 이미 머리카락의 특정 호르몬을 분석해 치매를 진단하는 길을 열었다. 머리카락으로 분석한 각종 호르몬 수치의 변화를 색깔로 표시하는 방법도 개발했다. 환자의 질병 상태를 한눈에 알 수 있게 한 것이다.
최 박사는 초등학교 3학년부터 중학교 2학년까지 육상과 축구부 선수로 활약했다. 운동을 그만둔 것은 지나친 운동으로 골반 연골이 닳았기 때문. "그때까지 운동만 했어요. 공부의 출발이 너무 늦었던 것이죠. 하지만 한 단계씩 꾸준히 올라가자 생각했습니다."
그는 재수 끝에 건국대 농화학과에 들어갔다. 2학년부터 수업이 끝나면 바로 실험실로 가 허드렛일부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석사 2학기 때 논문이 끝났다. 남은 두 학기 동안은 식품의약품안전청(당시 국립보건원)에서 학생연구원으로 지내며 현장 경험까지 쌓았다.
박사과정은 당시 약물 분석의 대가가 있던 성균관대 약대에서 했다. 여기서도 3년 반 만에 국제학술지에 논문을 24편이나 냈다. 지도교수는 그를 붙잡지 않고 "나중을 위해 가능한 한 좋은 학교에서 박사후연구원을 하라"고 권했다. MIT에 편지를 보냈는데 "빨리 오라"는 답이 왔다. 대학을 갈 수 있을지 고민하던 운동부 학생이 MIT에서 세계적인 학자들과 연구를 하게 된 것이다.
"한국에선 상하나 못 받았는데 MIT를 가니 연구논문을 발표할 때마다 상을 받았어요. 성격도 내성적이었는데 마지막 기차를 타고 집에 가면서 술 취한 미국인과 얘기할 정도로 외향적으로 변했습니다."
MIT에서 박사후과정을 마치자 KIST는 그를 호르몬 분석 전문가로 영입했다. 한때 그가 월 30만원을 받으며 임시직 연구원으로 일했던 곳이다. "운동을 그만둘 땐 과학자는 꿈도 꾸기 어려운 높은 곳에 있었어요. 하지만 한 단계씩 오르다 보니 어느새 내가 이곳에 있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