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벤처투자시장이 활성화된 것은 1990년대 후반부터다. IMF 이후 정부 차원에서 벤처기업을 육성하면서 벤처투자 시장도 따라 커졌다. 벤처캐피탈이 잇달아 설립됐고, 엔젤투자자 숫자도 크게 늘었다. 하지만 열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벤처투자 열기는 2000년대 초반 IT 거품이 꺼지며 사그라졌다. 한동안 국내 벤처캐피탈 시장은 침체를 면치 못했다.

다시 벤처투자에 불을 붙인 것은 정부였다. 미래 성장 동력을 확보할 목적으로 중소기업청이 2005년 4월, 한국벤처투자를 설립한 것이 대표적이다. 한국벤처투자는 벤처펀드에 출자하는 모태(母胎) 펀드를 운용하는 기관이다. 현재 1조3000억원 수준의 모태펀드 재원을 운용하고 있다. 국내 벤처캐피탈의 젖줄로 평가받는다.

현 정부 들어선 지식경제부나 정책금융공사 등 다른 정부 기관도 벤처펀드 조성에 공격적으로 동참했다. '신성장동력 산업 발굴' '녹색 산업 경쟁력 확보' 같은 정부 아젠다를 뒷받침하기 위해서다. 한국벤처캐피탈협회에 따르면 올해 11개 기관투자가가 벤처펀드 조성에 쏟아부을 재원은 사상 처음으로 1조원에 달할 전망이다. 기관투자가가 벤처펀드에 출자를 시작한 이후 최대규모다.

그래픽=조경표

◆ 몸집 커진 한국 벤처캐피탈

정책금융공사는 최근 3000억원을 출자해 10여개의 벤처펀드를 설립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한국벤처투자도 모태펀드 출자 사업을 꾸준히 진행 중이다. 올해에만 기관투자가와 민간 출자금을 더해 약 1조4000억원이 넘는 돈이 벤처투자 시장에 풀릴 전망이다. 지난 2009년과 2010년에 조성된 전체 벤처 펀드 규모도 각각 1조4100억원과 1조5900억원에 달했다.

국내 벤처투자 시장은 이미 달아올랐다. 정책금융공사와 지식경제부 등이 조성한 신성장동력 사모펀드(PEF)와 맞물려 벤처투자 시장에 많은 돈이 쏠리고 있다. 그 결과 지난해엔 최근 10년을 통틀어 최대 규모인 3조1010억원이 벤처기업으로 흘러들었다. 일반 제조업체(28.4%)와 정보통신(27.1%) 분야에 대한 투자가 많았다. 영화 등 엔터테인먼트 투자도 지난해 전체 투자 중 24.6%를 차지했다.

벤처투자 시장에 돈이 쏟아지면서, 주요 벤처캐피탈은 PEF로 진화하려는 움직임까지 보이고 있다. 이미 운용자산이 2조원에 가까워지며 PEF로 성장한 스틱인베스트먼트가 대표적인 사례다. 최근엔 SL인베스트먼트, LB인베스트먼트, 엠벤처투자##등이 PEF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상황이 이렇자 투자금이 많이 풀려 투자 경쟁이 치열해졌고 결국 소진율이 낮아지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지적도 있다. 실제 정책금융공사는 벤처 펀드 소진율이 낮다는 것을 이유로 출자 사업 발표 시기를 늦추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벤처투자 금액이 부족하다는 주장이 나온다. 한국벤처캐피탈협회 관계자는 "지난 2009년 미국과 이스라엘은 각각 GDP의 0.2%와 1%를 벤처투자에 쏟은 데 비해 우리나라는 아직 0.13% 수준에 머물러 있다"고 지적했다.
 

출처=한국벤처캐피탈협회

◆ "해외투자 축, 운용사에서 기관투자가로"

국내 벤처캐피탈의 해외 투자 움직임은 어떨까. 가장 주목해야 할 점은 해외투자를 추진하는 중심 축이 벤처펀드 운용사(GP·General Partners)에서 기관투자가(LP·Limited Partners)로 바뀌고 있다는 점이다.

국민연금이 최근 벤처캐피탈과 PEF를 대상으로 발표한 9000억원 규모의 팬 아시아 펀드 조성사업은 상징적인 사례다. 국민연금은 오는 26일까지 펀드 자산 중 해외 지역에 45%까지 투자할 수 있는 펀드 결성을 추진하고 있다. 펀드 유치를 추진하고 있는 A 벤처캐피탈 관계자는 "수익성을 중시하는 국민연금이 해외 투자로 눈을 돌렸다는 것은 주목할만한 움직임"이라고 분석했다. 지식경제부 역시 1000억원 규모의 글로벌 펀드 운용사로 삼호그린인베스트먼트·360ip 컨소시엄을 선정했다.

그동안 국내 벤처캐피탈의 해외 투자는 운용사의 자체 노력에 의존한 경우가 많았다. 아주IB투자가 지난해 벨기에 화학업체 솔베이로부터 자금을 유치해 펀드를 결성한 것이 몇 안 되는 사례 중 하나였다. 올 초 한국벤처투자가 이스라엘과 공동 펀드를 결성했지만, 사실 정책적인 성과를 얻기 위한 성격이 강하다. LB인베스트먼트 구중회 이사는 "주요 기관투자가들이 반신반의했던 해외 투자의 중요성을 깨닫고 있다"며 "국내 벤처캐피탈도 선진 벤처캐피탈처럼 해외 투자 비중을 점차 늘릴 것"이라고 평가했다.

◆ M&A·엔젤투자 부진은 숙제..투자분야 편중도 고민

국내 벤처투자 분야의 오랜 고민은 낮은 비중의 인수·합병(M&A)과 사실상 전무한 엔젤투자다. M&A는 벤처캐피탈이 투자금을 거둬들이는 방법 중 하나다. 일반적으로 벤처캐피탈은 벤처기업에 투자한 투자금을 회수하기 위해 증시에 벤처기업을 상장하거나 대기업에 회사를 매각한다. 실리콘밸리의 경우 애플·오라클·시스코·휴렛팩커드(HP)·구글·마이크로소프트 등 대기업이 적극적으로 M&A를 주도한다. 지난해 미국에선 전체 벤처캐피탈의 투자금 회수 중 72.3%가 M&A를 통해 이뤄졌다. 이런 과정을 통해 대기업은 성장 동력을 확보한다.

IPO를 통해 투자금 회수에 성공한 회사는 27.7%에 머물렀다. 하지만 국내 벤처투자의 경우 90% 이상 기업공개(IPO)에 투자금 회수를 의존한다. 이후 코스닥 시장에 상장된 벤처기업 중 상당수가 머니게임에 휘말려 상장폐지되는 등 자취를 감춘다. 악순환인 셈이다.

왜 M&A가 부진할까. 가장 큰 원인으로 지적재산권이나 인력 같은 무형 재산을 경시하는 풍토가 꼽힌다. 한 벤처기업 관계자는 "최근 모 소프트웨어 회사가 M&A를 시작한 후 상대 회사의 핵심인력을 따로 접촉해 빼내간 다음 M&A를 무산시켰다"며 "미국 같은 벤처투자 선진국이었다면 소송감이었지만, 국내에선 흔히 있는 일"이라고 전했다. 도입 초기 벤처기업 M&A의 새로운 수단이 될 것이라던 스팩(SPAC)의 부진 역시 M&A 부진에 일조하고 있다.

벤처기업 간 합종연횡도 찾아보기 어렵다. 시스템반도체가 대표적이다. 비슷한 규모의 기업끼리 합병하는 일이 거의 없었고, 결국 대부분의 기업이 소멸했다. B벤처캐피탈 관계자는 "대만의 시스템 반도체 기업들이 미디어텍을 중심으로 뭉쳐 경쟁력을 갖춘데 비해 우리나라 벤처기업들은 서로 경쟁하다 모두 무너졌다"고 지적했다.

벤처생태계의 근간을 이루는 엔젤투자가 거의 전무하다는 것도 한국 벤처투자 업계의 고질적인 숙제다. 지난 2000년 2만8975명이던 엔젤투자자 숫자는 2009년 1243명으로 줄었다. IT거품이 붕괴하며 엔젤투자자가 대부분 벤처투자 시장을 떠났다. 한국벤처캐피탈협회 벤처투자정보센터에 따르면 지난해 전체 벤처펀드 출자 금액 중 엔젤투자자가 차지하는 비중은 181억원에 머물러 1.1%를 차지하는 데 그쳤다. 외국인(4.1%) 보다 낮은 수치다.

투자 업종이 선진 벤처캐피탈에 비해 미미하다는 점도 잠재적인 불안 요인으로 지적받고 있다. 국내 벤처캐피탈이 지난해 생명공학 분야에 투자한 비중은 7.7%에 불과했다. 환경복원이나 원료재생 등 클린텍 분야에 투자한 비중은 0.6%였다. 해외 투자 역시 수치를 집계하기 어려울만큼 미미한 수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