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생상품의 일종인 ELW(주식워런트증권)를 사고파는 '스캘퍼(초단타매매자)'들은 0.02초에 승부를 건다.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빨리 ELW를 사고 팔아서 수익을 내기 위해서다. 이 과정에 스캘퍼들과 증권사 직원 사이에 '검은 돈'이 오가기도 했다. 스캘퍼는 증권사로부터 남들보다 빠르게 거래할 수 있는 전용회선을 제공받고, 증권사 직원은 거래 수수료를 챙길 수 있는 '윈·윈 게임'이었기 때문이다.

파생상품은 주식이나 채권·통화 등의 자산가격 급변에 따른 투자 손실을 조금이라도 줄이거나 소액으로 높은 수익을 내는 '지렛대 효과'를 위해 만들어진 금융상품이다. 우리나라가 거래량 기준으로 세계 1위를 자랑하는 시장이기도 하다. 하지만 파생상품 시장은 이제 개인 투자자들에게 '대박'을 노리는 투기장으로 변질됐다. 세계 1위라는 화려한 성적표 이면에는 투기와 시세조종, 불법적인 돈거래가 판치고 있는 것이다.

허울뿐인 파생상품 1위

8일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우리나라 파생상품 시장의 하루 평균 거래금액은 64조원에 달한다. 1996년 우리나라 파생상품시장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 1574억원과 비교하면 15년 만에 408배 늘어났다. 같은 기간 거래량은 4000배 넘게 폭증했다.

지난해 거래량은 37억5000만건으로, 2년 연속 세계 1위다. 전 세계 파생상품 거래량의 16.8%가 우리나라에서 발생했다. 상품별로 코스피200 옵션이 세계 1위, 코스피200 선물 및 미국 달러 선물 거래량은 각각 세계 6위다. 숫자만 놓고 보면 우리나라 파생상품 시장은 미국·유럽 등 금융 선진국들을 압도하는 수준이다.

하지만 내실을 뜯어보면 얘기는 달라진다. 우리나라 파생상품시장은 위험회피라는 본연의 역할과는 거리가 멀어졌다. 개인 투자자들에게 파생상품시장은 이미 투기판으로 변질됐다.

코스피200옵션 한 상품이 전체 거래량의 94%를 차지할 정도로 특정 상품에 편중돼 있다. A증권사 파생상품 담당 연구원은 "개인들이 확률이 거의 없는 코스피200옵션 상품에 로또 사듯 투자하고 있다"고 말했다. 수익이 날 확률이 높은 파생상품은 아예 외면하고, 원금을 모두 날리더라도 수십~수백배 수익을 낼 수 있는 파생상품에 개인 투자자들이 몰리는 것이다. 이 때문에 파생상품시장을 두고 '여의도의 강원랜드(카지노)'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다.

B증권사의 한 영업직원은 "주식해서 돈 날리면 한꺼번에 만회하기 위해 (투기성이 높은) 옵션에 뛰어들었다가 결국 '쪽박'차는 경우가 허다하다"며 "파생상품 시장에 개인 투자 비중이 높다는 것은 그만큼 투기가 만연하다는 방증"이라고 말했다.

배보다 배꼽이 큰 한국증시

파생상품시장이 현물시장보다 과도하게 커진 것도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파생상품은 말 그대로 주식이나 채권·통화와 같은 기본자산에서 파생된 상품이다. 이들 시장이 제대로 발달해야 파생상품 시장도 함께 발전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정반대다. 꼬리라고 할 파생상품시장은 세계 1위를 자랑하지만, 몸통이라고 할 현물시장(보통의 주식시장)의 규모는 세계 17위(시가총액 기준)에 불과하다.

지난해 발생한 도이치증권 매물 폭탄 사건도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진 탓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C운용사 파생상품운용본부장은 "한국은 파생상품 시장이 매우 발달돼 있어 외국인 투자자 입장에서 '장난치기' 좋은 곳"이라고 말했다.

파생상품의 투기화를 막기 위해 거래세를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조세연구원 홍범교 선임연구원은 "한국거래소 입장에서는 파생상품이 수익 창출원이 되고 있다"며 "과도한 투기를 억제하기 위해서라도 파생상품에 거래세를 부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