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 43조원에 달하는 시장의 D램 반도체 패권을 놓고 일본이 19년 만에 '회심의 반격'을 가해왔다. 삼성전자·하이닉스보다 앞서 세계 최초로 회로 간격(선폭)을 25나노미터(1나노미터는 10억분의 1미터)까지 줄인 D램 반도체를 개발해 7월부터 양산하겠다는 것이다. 모처럼 맞은 호기에 일본에서도 흥분 일색이다.

'D램'이란 정보를 쓰고 지울 수 있는 전자기기용 메모리반도체의 일종으로 대용량 제작이 쉬워 PC의 주기억장치로 쓰인다. 세계 시장 규모는 지난해 약 403억달러.

한국은 삼성전자가 1983년 D램 생산을 시작한 이후 일본 기업들과 생사를 건 기술전쟁을 벌여왔다. 같은 면적의 반도체칩에 더 많은 회로와 기능을 집어넣는 '집적도(集積度) 전쟁'이었다. 이 전쟁에서 한국은 1992년 세계 최초로 64메가 D램을 개발하며 일본을 추월, 역전에 성공했다. 그 이후 한 차례도 일본에 뒤진 적이 없었다. 이후 일본은 세계 D램 시장점유율이 10%대로 떨어졌다. '벼랑 끝'까지 몰렸던 일본이 이제 19년 만에 기술 재역전을 선언하고 나온 것이다. 다만 일본 엘피다메모리(엘피다)는 예전에도 '새 D램 개발' 발표를 해놓고 실제 양산은 계획보다 늦었던 예가 여러 번 있었다. 따라서 엘피다의 이번 발표가 'D램 반도체시장 재역전'으로 이어질지 의문을 표시하는 전문가들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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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밀릴 수 없다" 회심의 반격

엘피다는 '한국 타도'를 명분으로 탄생한 기업이다. 사카모토 유키오 엘피다 사장은 한때 "대만 기업과 연합해 세계 시장 40%를 갖고 삼성은 점유율 30%에 그치게 할 것"이라고 호언하기도 했다.

그러나 엘피다는 사카모토 사장의 호언과는 달리 그동안 제대로 된 '반격'을 못해 왔다. 오히려 반도체 집적도를 높이는 기술 경쟁, 즉 '선폭 줄이기 경쟁'에서 번번이 밀렸다.

'선폭 줄이기 경쟁'이란 반도체 내에 보다 많은 회로를 넣을 수 있도록 간격을 줄이는 것이다. 선폭을 줄이면 같은 회로를 더 작은 반도체에 넣을 수 있다. 같은 버스에 어른보다 덩치가 작은 아이들이 더 많이 탈 수 있는 것과 같다. 그만큼 반도체를 만들 때 개당 이익과 생산성이 높아진다.

엘피다는 이 경쟁에서 한국 업체들에 밀리면서 점유율과 이익까지 내리막길을 걸어왔다. 지난해 한국 업체(삼성전자 37.5%, 하이닉스 21.5%)는 시장점유율에서 엘피다(16.2%)를 압도했다. 올 1분기 실적에서도 엘피다는 영업 적자가 60억엔(784억원)으로, 영업이익률 -7%를 기록했다. 삼성전자(18%)와 하이닉스(12%)는 모두 두 자릿수 영업이익률이었다.

그러나 이번 25나노 공정 기술 개발로 엘피다는 '한국 추월'의 계기를 마련했다. 엘피다는 절치부심하며 지난해부터 연구개발(R&D) 기반을 꾸준히 강화해 왔다. 지난해 초에는 자회사인 렉스칩을 통해 대만에 연구개발센터를 세웠다. 지난 2월에는 대만 증시에 상장해 1억5000만달러를 증자하고 연구개발·투자 자금을 확보했다.

반도체업계 한 관계자는 "엘피다가 지금 아니면 한국을 따라잡을 수 없다고 본 듯하다"며 "이번 성과로 엘피다에 약 6개월 앞서가던 한국 업체들이 오히려 4~5개월의 격차로 쫓아가게 됐다"고 말했다.

◆국내 업계 "큰 영향은 없겠지만…"

일본의 추격이 거세지자 국내 업체들도 사태 파악에 나섰다. 일단 삼성전자는 "별 영향은 없을 것"이라고 평가절하하고 나섰다. 반도체 D램의 선폭을 먼저 줄였다고 해도 대량 생산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불량률이 30% 이상 나오면 경제성 때문에 시장에 제품을 내놓을 수 없다"며 "엘피다가 계획대로 7월 신제품 양산이 가능할지 두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엘피다는 올 1분기 초 양산하겠다고 밝힌 30나노급 D램조차 아직 양산하지 못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전자와 하이닉스는 이미 양산하고 있는 것이다. 전자업계 한 관계자는 "자금 사정이 좋지 않은 엘피다가 제대로 성숙하지 않은 기술개발 내용을 발표해 자금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하는 소재로 삼으려는 의도는 아닌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김영찬 신한금융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엘피다가 개발한 제품은 일단 연구개발 단계의 시제품으로 보인다"며 "엘피다가 과연 약속대로 반격에 성공할 수 있을지 지켜볼 것"이라고 말했다.

☞ 엘피다 메모리(ELPIDA Memory)

일본의 유일한 D램 메모리 반도체 회사. 1999년 히타치와 NEC의 D램 사업부가 합쳐 출범했다. 삼성전자·하이닉스에 이어 세계 시장점유율 3위(16.2%). 최근 대만의 파워칩 D램 공장도 인수해 덩치를 불리고 있다. 엘피다는 그리스어로 '희망(hope)'을 뜻한다. 한국 업체를 따라잡겠다는 일본 반도체 업계의 희망을 담은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