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3일 서울 동대문구 제기동의 청량리 청과물도매시장 입구. 안쪽으로 100m를 걸어 들어가니, 폭 10m의 길 양편으로 100여개의 상점들이 줄지어 있었다. 속칭 '청량리 식품 땡처리 시장'이다. 라면·음료수·과자·커피·고추장 등 모든 가공식품이 다 있는 곳이다. 토요일이었지만 시장은 오가는 트럭들이 꽉 차 걷기가 불편했다. 식품을 시장에 팔러 온 트럭과 식품을 사서 싣고 나가는 트럭들이다.

D상점 앞에는 라면상자가 사람 키를 훌쩍 넘는 2.5m 높이로 쌓여 있고, 특히 새로 나온 지 20일 된 '신라면 블랙'이 가장 앞에 놓여 있다. 상점 사장에게 가격을 물어보니 20개들이 한 박스에 2만3800원이었다. 이마트에선 똑같은 물건을 2만6400원에 팔고 있다. 주인은 "수도권에서 우리 집만큼 싼 집은 없다"며 "어떤 물건이든 물어보라"고 자신있게 말했다.

서울 동대문구 제기동의 속칭'청량리 땡처리 시장'. 음료수부터 라면, 고추장, 생리대까지 박스째 쌓여 있다. 대형마트보다도 가격이 싸지만 현금만 받는 것은 단점이다.

시장의 공식 명칭은 '청량종합도매시장'이지만, 식품업체들은 '청량리 땡처리 시장' 혹은 '청량리 덤핑 시장'이라 부른다. 1960년대부터 운영되고 있지만, 식품업계 사람들이 아니면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다른 대도시에도 비슷한 시장이 있지만 규모는 이곳보다 훨씬 작다.

이곳 시장 상인들은 식품업체로부터 물건을 사서, 수퍼·식당 등 자영업자나 소매점 배달업자에게 되판다. 상인들은 일반 소비자들은 상대하지 않으려고 하지만 박스 단위 등 일정한 규모 이상을 사겠다고 하면 판다.

이 시장의 가장 큰 특징은 '물건에 하자가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싸다는 점.

D상점의 길 건너 골목으로 들어가면, 콜라 등 음료 상자가 가득 쌓여 있는 M상회가 나온다. 코카콜라 제로 1.5L 12개들이 한 박스의 가격은 2만원으로, 역시 이마트의 2만2200원보다 쌌다.

인근 C상점에서는 100개들이 커피믹스를 1만500원에, B상점에선 생리대 18개를 3200원에 팔았다. 대형마트에서 팔리는 똑같은 제품보다 10~20% 싼 값이었다.

이렇게 싸게 팔 수 있는 이유는 이곳이 속칭 '밀어내기'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식품회사의 각 대리점들이나 영업사원들은 매출 목표를 할당받는다. 특히 월말이나 연말이 되면 목표를 맞추기 위해 청량리 덤핑시장 상인들에게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싸게 판다.

업계에서 '밀어내기' 혹은 '날리기'라고 부르는 방식이다. 대리점과 영업사원은 '날리기'로 본 손실을 연말 본사로부터 매출 실적을 달성했거나 초과했을 때 받는 성과급으로 상쇄한다.

대리점과 영업사원들이 이런 식의 거래를 하는 이유는 매출 목표를 못 채울 경우, 대리점은 재계약을 못하고 영업사원은 능력을 의심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익명을 요구한 식품업계 영업부장 A씨는 "성과급이 매출의 5~10%에 달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

청량리'땡처리 시장'에서 소매상과 도매상이 거래를 하고 있다. 마트보다 싸게 구입하는 대신 거래는 현금으로만 이뤄진다.

청량리 덤핑 시장의 상인 K씨는 "과거와 달리 정상적인 거래가 더 많다"고 주장하면서도, "밀어내기 물량의 가격이 싼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밀어내기가 성행한다는 증거는 몇 가지가 있다. 우선 이곳 상인들은 현금 거래를 철칙으로 하고 있다. 카드로 계산하면 거래가 다 잡히기 때문에, 지금처럼 싼값에 팔기 어렵다.

또 자영업자들 사이에서는 "청량리 덤핑 시장에서 대량으로 물건을 사려면 10번은 명함을 돌려야 한다"는 말이 퍼져 있다. 공개돼서는 안 되는 일이 있는 것이다.

최근처럼 가공식품 가격이 계속 오를 때면, 청량리 덤핑 시장은 더 바빠진다. 오르기 전에 사놓으려는 수퍼·식당 자영업자들의 수요가 몰리기 때문이다. 23일의 경우 하루 전 9.9% 가격 인상을 발표한 동서식품의 커피믹스와 커피가 시장 전체에 널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