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 거품이 극심했던 2000년엔 펀드매니저들이 낮술 먹고 IT주를 샀습니다. 실적이나 뭐로 봐도 맨정신엔 도저히 살 수 없었기 때문이었죠. 주가는 날아가고, 따라 사야지 어쩌겠습니까. 지금은 그때보다 더 심한 거 같아요."
한 투자자문사 대표가 요즘 우리나라 증시를 두고 한숨 쉬듯 내뱉은 말이다.
코스피지수는 사상 최고를 기록하며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다. 하지만 증시 내부에서는 오르는 종목만 오르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으로 증시 불균형이 심화되고 있다. 일부 종목이 이끄는 증시는 언젠가 한계에 부닥치게 되고, 결국 증시 전체 붕괴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마저 나온다.
◆부익부 빈익빈 심해진 국내 증시
지난 21일 코스피지수는 장중에 2200을 가볍게 넘었다. 그런데 이날 증시에서는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코스피지수는 28.63포인트(1.3%)나 올랐는데 유가증권시장에서 상승한 종목은 375개, 하락한 종목은 448개로 주가가 떨어진 종목이 훨씬 더 많은 것이다. 몇 개 안 되는 종목이 지수 전체를 끌어올린 것이다.
올 들어 업종별 지수 등락률을 살펴보면 부익부 빈익빈 현상은 더욱 두드러진다. 작년에 67.4% 급등했던 에너지화학 업종은 올 들어서도 4개월 만에 43.1% 급등했다. 이어 자동차, 철강 업종이 각각 38.4%, 28.8% 올랐다. 조선·반도체·IT 업종은 한자릿수 상승에 그쳤고, 건설·금융·은행·증권·운송업종은 오히려 하락했다. 사실상 에너지화학·자동차·철강 등 3개 업종이 전체 증시를 끌어가는 셈이다.
개별 종목을 살펴봐도 시가총액 10위권 내 종목 가운데 현대차와 기아차는 올 들어 34.5%, 54.2% 올랐고, LG화학이 43.0%, SK이노베이션이 26.3% 급등했다. 금호석유화학은 150% 폭등했고, OCI는 넉 달 만에 거의 2배 올랐다. 이 때문에 요즘 증시에서는 1960년대 말~1970년 초 미국 증시에서 기관투자가들이 선호해 주가가 많이 올랐던 '니프티 피프티(nifty fifty·1970년대 미국 기관투자가들이 선호했던 50개 종목)'에 빗대 '니프티 투엔티(nifty twenty)'라는 말도 등장했다.
◆'그들만의 리그'에는 이유가 있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질까. 우선 자금 흐름의 변화 때문이다. 주가가 급등했던 1999년 '바이코리아' 열풍 때나 2005~2007년 적립식 펀드 열풍 때는 자금이 펀드로 몰렸다. 당시 펀드는 시가총액 상위 종목 대부분을 편입하는 정통 펀드가 주를 이뤘고, 펀드별 특징도 크지 않아 주가가 고르게 올랐다. 하지만 지난해부터 자금이 소수 종목에 집중투자하는 자문사로 쏠리면서 종목별 차별화가 심해졌다. 여기에 주식형펀드를 운용하는 펀드매니저들도 수익률을 높이려고 자문사 따라하기에 나서면서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A운용사 펀드매니저는 "매니저들이 펀드 환매 때문에 주식을 팔아야 하는데, 많이 오른 종목을 파는 게 아니라 부진한 종목을 집중적으로 팔면서 악순환이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우리나라 수출기업과 내수기업의 실적이 양극화된 것도 증시 불균형의 원인으로 꼽힌다. 내수기업인 금융·소비재 기업의 성장성은 한계에 다다랐다는 분석이 나오는 반면, 화학·정유·자동차 등 수출주들은 성장세를 이어가는 신흥시장 덕분에 실적이 꾸준히 좋아졌다.
◆증시 불균형은 더 심해질 듯
과거 우리나라 증시에서는 대형주가 많이 오르면 중소형주로 투자자들의 관심이 넘어갔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오르는 종목만 오르는 증시 불균형이 계속될 것으로 예상했다. 하이투자증권 조익재 리서치센터장은 "자금 쏠림 현상이 바뀌지 않는다면 시장 주도 세력이 선호하는 종목만 오르는 현상은 심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신한금융투자 이선엽 연구원도 "국민연금이나 퇴직연금처럼 장기 투자를 하는 기관투자가의 주식 투자가 늘면서 대형주 품귀 현상까지 나타나고 있어 대형주를 중심으로 한 상승세는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증시 불균형의 위험을 경고하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B자문사 대표는 "10년 넘게 증시를 봐왔는데 요즘처럼 쏠림 현상이 심했던 적은 없었다"고 말했다. C운용사 펀드매니저는 "특정 자문사가 자동차 종목을 집중 매수하자 운용사들까지 가세해 주가를 끌어올렸다"며 "매니저들 사이에서는 누가 먼저 (자동차주를) 던지는지 눈치만 보는 상황"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