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붕이 날아가고 벽에 금이 쩍쩍 가도 못 고치게 합니다. 마을 길은 곳곳이 파여서 비만 오면 진흙탕이 됩니다. 정부가 약속했으면 개발사업을 진행하든지 아니면 손해배상해 주고 빨리 관둬야 하는 거 아닙니까."

지난 12일 오후 찾아간 강원도 원주시 무실동 송삼마을은 폐허에 다름 아니다. 시멘트 기왓장이 날아가 버린 집 지붕은 파란 천막으로 덮여 있었고, 마을회관 창문은 대부분 깨져 있었다. 개울에는 흙이 쌓여 길인지 개울인지 도무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마을 주민 김모(63)씨는 "보상만 기다리다 살기 좋던 마을이 폐허가 돼버렸다"며 "집을 버리고 일찌감치 떠나는 주민도 있다"고 말했다.

지난 12일 강원도 원주시 무실동 송삼마을의 한 주민이 금이 가서 무너지려는 자신의 집 외벽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택지개발사업이 곧 시작된다는 말에 수리도 못 하고 바람과 물이 들어오지 않게 커다란 판자로 대충 막아놨다"고 말했다.

송삼마을은 2009년 1월 당시 주택공사(현 LH·한국토지주택공사로 통합)가 택지개발예정지구로 지정했지만 사업성이 없어 개발사업 진행 여부가 불투명한 곳이다. LH는 토지보상도 미룬 채 사업을 계속할지 취소할지를 결정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법적으로는 분명 개발예정지인지라 집·도로 등이 무너지고 망가져도 손을 댈 수 없다. 수리를 하면 보상을 노린 불법행위로 취급받기 때문이다.

◆LH 사업 중단으로 공사도, 주민도 빚더미

LH는 지난해 신도시·택지지구로 지정했던 138개 사업장에 대해 사업 취소·보류 여부를 발표하기로 했다가 무기한 보류해 버렸다. 이 때문에 지금은 LH도 주민도 빚더미에 올라앉았다.

현재 개발 예정지역 주민들은 사업이 계속 진행되는지 취소되는지조차 모른 채 LH측 눈치만 살피고 있다. LH는 2009년 10월 출범과 동시에 사업구조조정을 하겠다고 발표했지만 1년 5개월이 지나도록 구조조정 대상을 단 한 곳도 공개하지 않았다. 그사이 정부 발표만 믿고 보상금 받을 기대로 미리 대출을 받아 인근에 땅과 집을 산 주민들은 빚더미에 올라앉았다.

LH의 사업구조조정 대상 중에서도 규모가 큰 곳은 경기도 파주 운정3지구, 오산 세교3지구 등 5개 신도시. 경기도 파주 교하읍 다율리에서 3300㎡(약 1000평) 규모로 벼농사를 짓던 이모(46)씨는 이곳이 신도시 예정지로 지정돼 은행 대출을 받아 파주·연천 일대에 1만㎡(약 3000평)의 대토(代土)를 구입했다. 그가 물어야 하는 한 달 이자만 900만원가량. 이씨는 "은행 이자 갚느라 남아 있던 논도 모두 담보로 잡혀 또 대출을 받았다"며 "정부 약속을 믿었다가 거지가 될 판"이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교하3지구 주민들은 지난 10월부터 집단행동에 나서 지역 대표들은 머리를 삭발하고, 주민들은 국회와 LH, 청와대 등을 돌며 시위를 벌였다.

2009년 9월 신도시 예정지로 지정됐다가 사업이 중단된 채로 있는 오산 세교3지구도 비슷한 상황. 마을 주민 장우종(52)씨는 이 지역에 토지 990㎡(300평)를 소유하고 있지만 이곳에 집을 짓지도 못하고 땅을 팔지도 못한다. 그는 "대한민국이 공산주의 국가도 아니고 남의 땅에 그림 하나 그려놓고 3년째 아무것도 못하게 꽁꽁 묶어놓고 있다"고 말했다.

◆"사업 취소 지역엔 손해배상해야"

LH는 당초 지난해 9월쯤 사업구조조정안을 발표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LH가 해당 지자체, 주민과의 협의에 실패하는 바람에 구조조정안 발표를 두 차례 연기했다. 그러다가 지난해 12월에야 구조조정안을 발표했지만 정작 사업장별 '사업구조조정 대상 명단'은 발표 내용에서 쏙 빼버렸다. 발표 전날 정치권에서 "명단을 공개하면 전국적으로 민심 이반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고 반발했기 때문이다. 또한 LH가 사업 조정 대상 지역 주민들의 대규모 반발을 감당하기 힘들다고 판단한 것도 중요한 원인이다. 당초 LH는 138개 사업장 중 30여개 사업장을 구조조정 대상으로 발표할 계획이었다.

지난해 10월 열린 국정감사에서는 여야 의원들이 "우리 지역구의 사업을 중단하면 기형적인 도시가 될 수 있다", "지역 주민의 동의를 받지 않고 사업 중단 여부를 결정하지 말라"며 LH를 압박했다. LH 관계자는 "LH의 빚은 정부의 적자 사업을 떠맡아 하다 보니 생긴 측면도 있는데, 국토부와 정치권이 모든 책임을 LH에 떠넘기고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LH가 지금이라도 사업구조조정 명단을 확실하게 발표해 전국적인 혼란 상태를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두성규 한국건설산업연구원 건설경제연구실 실장은 "LH의 사업구조조정 대상 발표는 언젠가는 꼭 정리해야 할 문제"라며 "취소 사업장에 대해서는 손해배상 등의 방안을 찾아 주민을 설득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