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동부 뉴욕과 보스턴 중간쯤에 있는 코네티컷주의 소도시 그로톤. 이곳에 상주 직원만 4200여명에 병원·은행·약국·여행사·안경점까지 갖춘 세계 최대의 기업연구소가 있다. 글로벌 1위 제약사 화이자의 그로톤 연구소다. 항구 건너편의 뉴런던 연구소와 함께 미국·영국·일본 등 세계 6곳에 흩어져 있는 글로벌 연구소들의 본부인 곳이다.
2009년 화이자가 이들 연구소에 연구개발비로 쓴 돈이 78억5000만달러(8조8000억원). 하지만 지난해 12월 그로톤 연구소에서 만난 선임연구원 채핀(Robert E. Chapin) 박사는 "신약 개발에서 낮은 곳에 있는 사과는 이미 다 땄다"고 말했다. 신약을 개발하기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는 의미다.
실제로 미 의회 등의 자료를 보면, 글로벌 제약사의 신약개발 비용은 1976년 건당 5400만달러에서 9억9100만달러로 천문학적으로 늘었다. 반면 신약 개발 건수는 2000년대 들어 오히려 줄고 있다. 채핀 박사는 "역설적이지만 위기의 원인은 생명과학의 발전"이라고 말했다.
예를 들어 1977년 의학계는 당뇨병 치료제인 인슐린이 인체에서 결합하는 곳을 한 군데만 알고 있었다. 2008년엔 그 과정들이 너무 많이 밝혀져 그림 한 장에 그리면 알아볼 수 없을 정도가 됐다는 것. 이 모든 것을 감안해서 부작용 없는 신약을 개발하려면 천문학적인 돈과 엄청난 시간이 들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화이자가 선택한 해결책은 '더 똑똑하고(smarter), 더 많은 것을 동시에 하는 것(more in parallel)'이었다. 그로톤 연구소는 로봇으로 96개 세포에 각각 다른 신약 후보물질을 동시에 주입해 시험하는 기술을 최초로 개발했다. 이는 3456개 세포를 동시에 시험하는 기술로 발전했다. 약이 작용할만한 세포 단백질을 모두 고르고 여기에 수많은 신약 후보물질을 시험하는 '융단폭격식' 개발이었다.
하지만 화이자는 요즘 더 이상 이 같은 방식을 자랑하지 않는다. 대신 처음부터 기초연구를 통해 최선의 공격대상과 수단을 고르고 약의 작용과정을 더욱 정밀하게 추적하는 일종의 '정보전과 정밀타격'으로 선회했다.
생물학자와 화학자의 구분도 사라졌다. 지식의 융합과 교류를 위해 연구동은 다양한 전공의 연구원들이 프로젝트별로 같은 층에서 함께 토론하며 근무할 수 있도록 개방형으로 돼 있다. 프로젝트의 진행과정은 중앙 홀의 전시판에 논문 요약 형태로 붙여놓아 오가는 연구원들이 자유롭게 보고 의견을 교환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런 노력의 성과가 마지막 임상시험이 진행 중인 알츠하이머 치매 치료제였다. 증세 완화에 그치는 치료제가 아니라 질병의 원인을 없애는 항체 치료제다. 연구책임자인 이레데일(Phil Iredale) 박사는 "원인 단백질이 생기자마자 바로 자체 면역력으로 없애버리는 백신도 초기단계 연구가 진행 중"이라고 말했다. 현재 그로톤의 신경과학분야 인력의 3분의 1이 알츠하이머 치매 치료제 개발에 매달리고 있다.
연구소 전체 조직도 변화하고 있다. 지난해 680억달러를 들여 인수한 백신전문 기업인 와이어스 연구인력과 기존의 연구조직을 통합하고 있는 것이다. 더글러스 지오다노(Douglas E. Giordano) 수석부회장은 뉴욕 본사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두 회사의 연구조직을 합치는 글로벌 연구개발 개편을 결정한 상태"라고 말했다. 와이어스 연구진의 상당수도 그로톤에 합류할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