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권사들이 운용하는 랩어카운트(증권사 맞춤형 종합자산관리서비스)가 과열 조짐을 보이면서 투자자 피해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랩어카운트란 고객이 맡긴 자금을 증권사가 주식·채권·펀드 등 다양한 금융상품에 투자해 수익을 얻는 금융상품으로 고객이 직접 증권사에 투자 대상 주식 종목의 매매를 주문하는 맞춤형 서비스가 가능해 각광을 받고 있다. 최근 10개월간 13조원이 넘는 시중 자금이 몰렸다.
이 같은 랩어카운트 과열에 대해 가장 우려되는 것은 소수 대형 종목에 증권사들의 투자가 집중돼 나중에 증시가 하락할 경우 다수 투자자들이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런 상황에 대비해 랩어카운트의 투자자 보호장치는 거의 없는 상태다.
증권사들이 펀드보다 높은 랩어카운트의 판매수수료만 노리며 고객들을 끌어들이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랩어카운트로 급하게 쏠리는 돈
29일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지난 1월 20조1000억원이던 랩어카운트 설정액(잔액)은 지난 10월 33조6000억원으로 10개월 만에 13조5000억원(67%)이나 불었다. 같은 기간 랩어카운트 투자자수도 48만명에서 64만명으로 16만명(33%) 증가했다. 증권사가 고객의 돈을 투자자문사에 다시 맡기는 자문형 랩어카운트의 경우 올 들어 누적 잔액이 300% 가까이 불어나며 4조원에 육박하고 있다. 자문형 랩어카운트는 주로 종목에 직접 투자하는 경우가 많다. 증권사들이 더 많은 고객을 유치하기 위해 일부 증권사들이 올 초 5000만원 정도였던 랩어카운트 최소 가입금액을 1000만원까지 낮추면서 경쟁이 과열되고 있다.
반면 주식형 펀드 설정액은 지난 2월 125조원에서 105조원으로 20조원이나 감소했다. 전문가들은 주식형 펀드에서 빠져나간 돈이 상당 부분 랩어카운트로 옮겨간 것으로 보고 있다.
◆일부 대형 종목만 급등, 투자자 보호도 어려워
랩어카운트들은 10개 안팎의 대형주에만 집중 투자하고 있다. 기아차·하이닉스·제일모직·삼성SDI·삼성전기·삼성테크윈·LG화학 등 랩어카운트가 주로 투자하는 종목들엔 '7공주'라는 별명까지 붙을 정도로 투자금이 몰리고 있는데 이런 쏠림현상이 해소되지 않고 있다. 지난 상반기 코스피지수는 0.92%만 올랐고 코스닥지수는 오히려 4.59% 하락했지만 7공주 종목들은 평균 36%나 올랐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펀드와 달리 랩어카운트는 증권사가 투자하는 종목이 바로 알려지는 바람에 개인들이 따라 사며 주가가 이상 급등하는 경향이 크다"며 "주가가 조정을 받으면 이들 종목의 거품이 꺼질 수 있다"고 말했다. 일부 종목에선 거품이 빠지는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하반기 들어 7공주 중 4종목은 마이너스 수익률을 기록하며 평균 8%만 올랐다. 같은 기간 코스피지수 상승률(19%)의 절반에도 못 미친 것이다. 투자자의 피해 가능성은 여전하지만, 랩어카운트는 펀드처럼 규제를 받지 않고 있다. 대중이 아닌 고객 개인과 증권사 간 사적(私的) 계약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랩어카운트 과열 판매는 높은 수수료 때문
랩어카운트 판매 경쟁이 격화된 주요 원인 중 하나로 높은 판매수수료가 꼽힌다. 작년 자본시장법 시행으로 펀드의 판매수수료는 3%에서 1%로 떨어진 반면 랩어카운트는 여전히 3%의 수수료를 챙길 수 있다. 판매 절차도 랩어카운트가 펀드보다 훨씬 간편하다. 펀드는 가입에 1시간이나 걸릴 정도로 절차가 복잡한 데 비해 랩어카운트는 간단한 서류 작성만으로 계약이 끝난다.
이런 가운데 내년부턴 시중 은행들도 랩어카운트 판매 경쟁에 뛰어들 태세다.
금융감독원은 랩어카운트로의 자금 쏠림을 막기 위해 지난 9월 최소 투자금액을 1억원으로 제한하는 규제안을 내놓았지만, 증권사들의 강한 반발에 부딪힌 상태다. 금감원 관계자는 "투자자 보호를 위해 내년 구체적인 규제안을 만들 예정"이라고 말했다.
☞ 랩어카운트(Wrap Account)
고객이 맡긴 자금을 증권사가 주식·채권·펀드 등 다양한 금융상품에 투자해 수익을 얻는 금융상품. 증권사 간 판매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최소 가입금액이 초기 5000만원에서 1000만원까지 낮아졌다. 1970년대 중반 미국에서 개발됐고, 호주·영국 등에서도 발달했다. 1990년대 중반 미국에서 랩어카운트가 급성장하면서 투자자 보호문제가 불거졌고, 이때 미국은 규제안을 마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