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금융감독원이 '환 헤지(hedge)' 상품인 이른바 키코(KIKO·Knock-In, Knock-Out) 판매 은행들에 대한 징계에 나서면서 키코가 다시 일반인들의 관심권에 들어왔다. 일반인들의 뇌리에서는 잊혀졌지만 2005년 한국에 처음 등장한 키코는 아직도 많은 기업인들에게는 악몽의 대상이다. 키코에 가입했다가 천문학적인 손해를 입은 끝에 회사가 폐업되거나 워크아웃에 빠진 기업인들은 "은행이 제대로 설명도 해주지 않고 키코 상품을 팔았다"며 치열한 법정 소송을 전개 중이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키코의 악몽 속으로 들어가 봤다.

일러스트 한규하

7代를 이어 살던 종가집 경매에

7대를 이어 살던 종가집이 법원경매에 부쳐졌다. 두 번의 유찰 후 8월 30일 세 번째 경매를 기다리고 있다. 이번 세 번째 경매에선 집이 넘어갈 듯하다. 66살 동갑의 노(老)부부는 "집을 비워야 할 것 같다"고 했다. "저희야 어디 방 한 칸 세라도 얻어 살면 되는데 손주들이 할아버지 집에 가자고 하면 뭐라고 해야 할지…. 지켜주지 못해서 죄스럽습니다." 인터뷰 내내 붉었던 눈에서 결국 눈물이 흘렀다.

법원 경매에 부쳐진 집과 10억원을 훌쩍 넘긴 은행 빚, 1억2000만원이 넘게 밀린 세금과 이를 확인이라도 시키듯 매달 날아드는 은행과 법원의 최고장, 수십 년간 분신처럼 여기며 일구었던 회사의 사망을 알리는 폐업신고서와 더 이상 쓸 수 없게 된 신용카드…. 이런 것들이 30년 넘게 사업가로 살아왔던 노부부가 손에 쥔 전부였다.

컬럼비아스포츠로 알려진 아웃도어 의류를 OEM(주문자상표부착 생산)으로 생산·수출했던 'BMC어패럴' 임종목·이순덕 공동 사장 부부. 부부는 "악몽을 꾸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2007년 12월 외환은행 거래 지점 직원의 권유에 못 이겨 가입했던 '키코'가 이 부부의 삶을 송두리째 무너뜨린 주범이었다.

부부는 2007년까지 11명의 직원을 뒀던 한국 사무실과 약 400명의 생산직원이 일하던 중국 공장을 운영하며 매년 90억원이 넘는 매출을 기록할 만큼 순탄하게 사업을 이끌어 왔다. 출신 대학 총동문회 부회장과 로타리클럽 회원으로 활동하는 등 부부의 인생과 사업은 남부러울 게 없었다. 임종목 사장은 "키코에 가입하기 전까지 외환과 관련해선 환전을 해본 게 전부"라며 "'환 헤지'라는 게 뭔지도 몰랐고, '환 헤지'라는 걸 단 한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고 했다. 그런 임 사장이 '환 헤지'의 기초 상품인 선물환보다 더 복잡하고 난해한 구조의 옵션파생상품인 키코에 어떻게 가입하게 됐을까?
 
은행 직원 끊임없는 권유에 가입

"2007년 중순부터로 기억하는데 경리 직원에게 하루가 멀다 하고 외환은행 국제센터지점의 수출금융담당 모 차장이 거의 매일 전화를 하거나 직접 찾아와선 '우리나라 수출기업들이 환율위험에 노출돼 있어 반드시 환 헤지를 해야 장사 잘하고도 손해보는 일이 없을 것'이라며 키코 가입을 권했다고 하더군요."

은행직원의 끊임없는 권유에 경리직원은 임 사장에게 "거래은행인데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어왔다고 한다. 처음에 임 사장은 "모르는 내용이라 가입할 수 없다"며 거절했다고 한다. 이후 은행직원은 몇 차례 임 사장을 직접 찾아왔다. 임 사장은 "해당 은행직원이 실적이 급했던 것 같았다"며 "은행에서 종종 캠페인성으로 보험, 카드영업을 하는 것처럼 키코도 수출기업을 상대로 캠페인 영업을 하는구나 생각해 별다른 생각 없이 가입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당시 그는 환율, 재무전문가가 없는 중소기업을 위해 은행이 대신 외환 관리를 해주는 것으로 생각해 고마운 느낌까지 가졌다고 했다. 그때가 2007년 12월이었다. 당시 그가 맺은 계약은 기준 환율 915원, 녹인(Knock-In·환율이 상단환율 이상으로 오르면 옵션이 발생하는 조건)이 되는 상단 환율 950원, 녹아웃(Knock-Out·환율이 하단환율 이하로 떨어지면 옵션이 소멸하는 조건)이 되는 하단 환율 877원으로 환율구간을 설정해 월 30만달러씩 결제가 이루어지는 조건이었다. 임 사장은 "당시 은행직원이 '앞으로 달러 환율이 800원대로 떨어질 수 있으니 잘 계약한 것'이라며 환율이 떨어질 가능성이 있다고만 알려줬을 뿐 1000원 이상 오를 수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고 했다.

"환율이 오르면 두 배, 세 배 손해볼 수 있다는 걸 말해줬다면 절대 가입하지 않지요. 상식적으로 보험금 1000원 타려고 100만원짜리 보험 드는 사람은  없잖아요. 근데 그런 이야기(환율이 1000원 이상 오를 수 있다)는 없었고, 단지 '(환율이) 오르면 오른 차액만큼 은행이 가져간다'고 했을 뿐입니다. 예를 들면 '1만원을 계약했는데 환율이 녹아웃 구간인 877원을 벗어나 876원이 되면 계약이 자동으로 해지되고, 녹인 구간인 950원을 벗어나 951원이 되면 950원은 내가 먹고, 1원을 은행이 먹는다'는 식으로 설명해 줬어요."

그는 "당시 키코를 권유하고, 계약했던 은행직원 역시 키코에 대한 기본지식조차 없었던 것 같다"고 했다.

2008년 2월, 그가 가입한 키코는 첫 달부터 계약 환율구간을 넘어 1800만원의 손실이 났다. 계약기간 1년 동안 두 번째 결제일이었던 2008년 3월을 제외하고는 모두 손실이 발생했다. 가입과 함께 환율이 무섭게 오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4월 979원이던 환율이 계약 만료쯤이던 12월엔 1390원까지 폭등했다. 덩달아 3000만~7000만원대이던 월 손실도 최고 2억8500만원대까지 치솟았으며 최종 14억7864만원의 손실을 안겨주었다.

키코로 인한 손해에도 불구하고 회사는 버틸 수 있었다. 주문이 몰리며 장사가 잘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발 금융위기가 정점으로 치닫던 2008년 가을이 되자 문제가 발생했다. 그는 "역시 키코 때문"이라며 말문을 열었다. "1년에 한 번씩 은행 자체적으로 무역회사에 대한 신용평가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이때 키코 손실이 있으면 은행과의 거래조건, 여신금액이 이전과는 달라져버리더군요. 은행이 우리 회사에 대해 '환율이 춤추는 추세라 여신한도를 정할 수 없어 더 생각해봐야 한다'며 전체 여신을 연장해주지 않았어요. 거기에 통장계좌까지 막아버렸습니다."
 
청와대에 넣은 민원 취소해도 모른 척

그는 "수출업체에 계좌를 막는 건 외국 기업과 거래하지 말라는 것 아니냐"며 울먹였다. 계좌가 묶이면서 해외 기업과의 거래가 중단됐고, 회사는 급격히 어려워졌다. 보다 못한 임 사장의 사위가 2008년 9월 초 청와대에 '은행의 횡포'라며 진정을 했다. 그 때문이었는지 금감원이 움직였다.

"'금감원에 고객님의 애로가 접수됐으니 와서 얘기하자'며 외환은행 본점 고객 담당이라는 곳에서 연락이 왔어요. 은행 본점에 갔더니 자기들이 다 해결해주겠다는 겁니다. 얼마 후 키코를 권유하고 계약했던 직원에게 전화가 걸려왔고 이메일도 보내왔어요. 그 내용이 사위가 청와대에 넣었던 민원을 취하해주면 잘 해결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겁니다."

그가 서류 하나를 보여줬다. '민원 취하서 양식을 송부드립니다'로 시작되는 외환은행 직원 모 차장이 회사나 지점명의가 아닌 개인명의로 임 사장에게 보냈던 이메일이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민원 신청인인 사위분 XXX씨께서 작성하셔야 되며 작성하셔서 저희은행(FAX 000-0000) 및 금감원(FAX 000-0000)에 FAX 송부하시고 금감원 XXX 조사역님(전화 0000-0000)께 취하 내용을 전화해 주시면 됩니다.…저희는 운명을 같이 한다고 생각하고 일하고 있습니다….감사합니다.'

임 사장은 은행과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생각에 그의 요구대로 해 주었다. 하지만 이후에도 임 사장에 대한 은행의 조치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는 "은행이 여신연장이 되지 않았던 대출의 만기연장을 해주지 않았다"고 했다. 대신 은행은 민원 취하 후 대출 상환을 요구하며 "기존 우리 은행에 담보로 제공돼 있던 임 사장 부친 소유 약 10억원 상당의 토지에 대해 담보를 해제해 줄 테니 이걸로 타 금융사에 가서 3억원 정도 대출을 받아 자신들의 대출을 갚으라"는 요구를 해 왔다. 대출 연장이 급했던 임 사장은 은행의 요구대로 담보해제를 받은 땅을 다시 새마을금고에 담보로 제공해 3억5000만원을 대출받아 외환은행에 갚았다고 한다.

이후 외환은행은 "앞으로 다가올 키코 손실액을 어떻게 납부할 것이냐"며 키코 납부를 위해 매달 500만원 적금 가입, 부모님 부동산 추가 담보 등 이해하기 힘든 여섯 가지 제안을 했다고 한다. 그는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정부에서 키코 손실 기업의 유동성 확보를 위해 긴급 운영자금 '패스트트랙' 제도를 만들었지만 이 역시 그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그는 패스트트랙을 받지 못한 이유에 대해 "은행에서 요구한 담보를 제공하지 못했기 때문으로 추정한다"고 했다. 더 이상 버틸 여력이 없던 임 사장은 2008년 10월부터 키코 손실액을 은행에 납부하지 못했다. 마지막 4달간 내지 못한 금액만 10억원이 넘었다. 결국 그는 무너졌다.

"은행계좌라도 열어줘야"

그는 키코 계약 만료일이었던 2008년 12월 24일 부친을 저세상으로 보냈다. 3일장을 치르던 12월 26일, 키코를 권유했던 외환은행 모 차장이 조문객으로 빈소를 찾았다. 그는 상주라는 입장 때문에 그를 향한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눌렀다고 했다. 모 차장이 돌아가고 몇 시간 후 외환은행 국제센터지점은 상중(喪中)인 임 사장에게 밀린 키코 연체금을 2008년 12월 29일까지 갚지 않으면 법적 조치를 취하겠다는 '최고장'을 보내왔다. 임 사장은 당시 받았다는 최고장을 보이며 "어떻게 문상까지 와 놓고, 상중에, 그것도 발인날 이런 최고장을 보낼 수 있냐"며 흥분했다.

BMC어패럴 임종목 사장

결국 은행은 그가 살던 성남 집을 경매에 부쳤다. 임 사장은 마지막 방법으로 법원에 '회생신청'을 했지만 이마저 기각됐다. 남의 손에 회사가 무너지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어 직원들을 내보낸 후 결국 자신의 손으로 회사의 문을 닫기로 결정, 올 2월 폐업신고를 마치고 회사 문을 닫았다.

현재 임 사장의 수입은 자신에게 70만원, 아내에게 30만원씩 나오는 총 100만원의 국민연금이 전부다. "신용카드들이 결제가 안되던데 다행히 국민연금 통장은 막지 않았네요. 다행입니다. 매일 아내가 끓여주는 사발면이 제 점심입니다."

모든 걸 잃은 지금, 임 사장은 "예전에 받은 것"이라며 '오백만불 수출의 탑' 트로피를 보여줬다. 1999년 무역일꾼으로 선정돼 김대중 전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표창장 내용을 읽어주기도 했다. 그는 "이때가 참 좋았다"며 다시 눈물을 흘렸다.

"흥청망청 써서 망한 것도 아니고, 죽으라고 일했는데 돈 한 푼 못 만져 보고 이렇게 되니 인생이 허망하다"며 임 사장은 "지금이라도 제발 일을 할 수 있도록 막힌 은행 계좌만이라도 열어주면 안 되겠느냐"고 했다.
 
알짜기업 코막중공업의 몰락

경기도 안산 반월공단 기업들 중 가장 잘나가던 기업으로 꼽혔던 코막중공업. 굴삭기·지게차 등의 건설장비, 특히 유압파쇄기 분야의 강자로 대접 받으며 세계 60여개국에 물건을 팔던 수출 기업이다. 수출로만 연 200억원이 넘는 매출을 올리며 승승장구하던 이 회사 역시 키코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다 지난 8월 18일 워크아웃이란 낭떠러지로 추락했다. 2008년 초만 해도 밀려드는 주문에 공장이 비좁아져 충북 음성에 39만6000㎡(약 1만2000평)의 신규 공장부지를 계약할 정도로 회사는 탄탄했다. 유럽과 북미 진출을 위해 네덜란드에는 공장부지를, 미국에는 창고부지를 확보하기도 했다.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겠다는 희망의 크기만큼 키코의 악몽은 이 회사 조봉구 사장을 더 괴롭히고 있다.

이 회사가 2008년과 2009년 키코 계약으로 입은 손실만 100억원에 육박한다. 매출 200억원에 영업이익률이 15%(코스피 상사 평균 영업이익률은 10% 내외로 알려져 있음)나 될 만큼 장사를 잘했지만 매년 50억원 가까이 발생하는 키코 손실과 눈덩이처럼 쌓이는 이자를 버틸 수가 없었다. 확보했던 네덜란드 공장부지와 미국 창고부지는 유동성 압박에 못 이겨 얼마 전 매각했다.

그뿐 아니다. 유동성 확보를 위해 반월공단 내 기존 공장마저도 처분해야 했다. 현재 코막중공업은 버려져있다시피 했던 반월공단 내 한 공장을 보증금 없이 월 1000만원에 세를 얻어 쓰고 있다. 워크아웃으로 쓰러진 현재, 공장 가동률은 30% 정도라고 한다. 조봉구 사장은 현재의 회사 사정에 대해 "지금이라도 원자재 사올 딱 40억원만 융통할 수 있으면 회사를 정상화시킬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게 안된다"며 안타까워했다.

그는 외환은행과 신한은행에 두 차례씩 총 4건, 220만달러짜리 키코 계약을 했다고 한다. 그 역시 "계약 당시 키코가 어떤 상품인지 알지 못했다"고 했다. 그가 키코의 늪에 빠지게 된 사연을 얘기했다. "2007년 중순부터 전혀 거래가 없던 외환은행과 신한은행 직원들이 찾아오기 시작했어요. 좋은 상품 있으니 설명이나 들어보라는 식이었죠. 그리곤 언젠가부터 본점 직원들도 지점 직원과 함께 찾아오더군요. 와서는 '수출기업은 환율 변동에 대비해야 한다'며 키코  가입을 권유했습니다."

처음엔 잘 모르는 상품이라 권유를 받을 때마다 거절했다고 한다. 하지만 2007년 11월을 넘어서며 찾아오는 은행 직원들로부터 귀가 닳도록 들어서인지 900원 아래로 떨어질 환율에 대비해야 한다는 소리가 자꾸 솔깃해졌다. 또 사업 확장을 위해 금융 다변화도 생각하고 있었고, 언론에서도 원화강세에 대한 보도를 접했던 터라 마음이 자꾸 기울었다. 당시 주거래은행은 산업은행이었다. 망설이던 그에게 은행직원은 "우량업체 1500개 기업에 포함시켜 VIP로 대우하며 관리해 주겠다"면서 키코 가입을 권유했고, 결국 그는 키코 계약서에 서명했다.

그는 "은행과 은행직원은 공공의 신뢰를 바탕으로 일을 한다고 생각해 전적으로 믿었다"고 했다. 그는 외환은행과 기준환율 920원, 상단 녹인 환율 940원, 하단 녹아웃 환율 900원에 1년 만기 70만달러 계약을 맺었고 신한은행(기준 환율 915원, 녹인 환율 940원, 녹아웃 환율 880원)과도 1년 만기 50만달러 계약을 맺었다. 그는 두 은행과 총 120만달러의 계약을 맺으며 키코 수렁으로 들어갔다.
 
'환율 물타기' 재계약, 피해 더 커져

키코에 가입하자마자 환율은 940원을 훌쩍 넘기며 970원대까지 올라갔다. 바로 억대의 손실이 터져 나왔다. 다급해졌다. 외환은행과 신한은행을 찾았다. 조 사장은 "당시 손실을 줄일 방법을 묻자 은행 직원들은 '키코 청산금액 26억원을 일괄 납부하면 키코 계약이 끝날 수 있다'고 했다"며 "은행에 '26억원이라는 돈이 어떻게 계산됐느냐'고 물으니 '현재 환율에 앞으로 남은 키코 계약 기간을 계산해 산출한 금액'이라는 답을 들었다"고 했다.

그가 한 번에 26억원을 갚기는 힘들다는 반응을 보이자 은행 측은 다른 방법을 제시했다고 한다. 기존 계약으로 빚어진 손실을 덮기 위해 기존 계약 조건에서 환율구간 혹은 계약기간과 계약금액을 늘리는 '환율 물타기', 이른바 '재구조'를 제시한 것이다. 예컨대 외환은행의 경우 기준 환율을 960원으로 올리고, 손실 발생 구간인 상단 녹인 환율을 990원, 계약 해지 기준인 하단 녹아웃 환율을 940원으로 조정하자는 제안을 했다. 계약금 역시 은행당 50만달러씩 추가해 100만달러를 늘리자고 했다.

코막중공업 조봉구 사장

또 외환은행은 기간 역시 1년에서 2년으로 연장할 것을 요구했다. 2년으로 연장하면 1년 계약에 비해 손실이 발생했을 때 손실 폭이 두 배 이상 확대될 수 있다. 물에 빠져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조 사장은 은행의 재구조 요청을 받아들였고, 그 결과 총 4건, 220만달러의 키코에 가입하게 됐다.

옵션파생상품인 키코 '재구조'는 물타기를 통해 손실을 줄여나갈 가능성도 있지만 반면 규모와 기간의 확장으로 기존 계약보다 몇 배의 손실이 발생할 위험이 있어 금융감독기관들로부터 감시 대상이었다. 하지만 은행이 요구한 26억원을 당장 마련할 수 없었던 조 사장은 은행이 제시한 재구조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에게 "재구조를 분명 외환은행에서 먼저 제시했냐"고 묻자 그는 "분명 외환은행에서 제시했다"고 했다.

재구조된 키코는 이전 계약보다 더 잔인하게 그의 목을 죄어왔다. 재구조 두세 달 만에 환율이 1000원을 넘어섰다. 그는 "하늘이 노래졌다"며 "수억 정도가 아니라 한 달에 10억원대가 넘는 돈이 손실금으로 쌓였다"고 했다. 자신에게 닥친 재앙이 믿어지지 않았던 조 사장은 재구조를 제안했던 외환은행을 다시 찾았다.

"대책을 마련해 달라고 했더니 외환은행에서 '국내 외국계 기업이 배당한 돈이 일시에 외국으로 빠져 나가 환율이 급등하는 것이니 곧 (환율이) 떨어진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그 말과는 달리 환율은 1000원대를 넘어 고공행진을 이어갔다.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키코 손실액이 부채로 쌓이며 회사는 급격히 어려워졌다. 급기야 주거래은행인 산업은행은 코막중공업을 요주의기업으로 분류, 여신한도를 아예 없애버렸다. 국내 금융권에서는 자금조달이 불가능해진 것이다. 유럽공장과 미국 창고부지를 매각하고, 인력구조조정과 사업부문을 조금씩 떼어 파는 등 자산 매각으로 생명을 연장했다.

"해외 자산을 급하게 처분할 수밖에 없었어요. 헐값이었죠. 일례로 네덜란드 공장부지를 110만유로에 매입했는데 이걸 70만유로에 팔았으니까요."

유동성위기를 겪고 있는 중소기업을 돕기 위해 정부가 긴급 운영자금으로 지원했던 패스트트랙을 2009년 2월 받았다.

"45억여원을 받아 그중 25억원 정도를 키코 막는 데 썼어요. 원래 패스트트랙은 운영자금으로 사용해야 하는데 워낙 급했어요. 막지 않으면 부채 연장 불가라는 입장을 보이더군요. 바로 부도로 몰아가는 분위기였어요."

자산 매각과 패스트트랙으로 그는 키코를 청산했다. 하지만 상처가 컸다. 그동안 쌓인 부채와 자산 매각이라는 출혈을 겪은 회사는 완전히 망가져 있었다. 예전 5~6%대였던 대출금리는 키코 꼬리표를 달면서 15~17%까지 올랐다. 이 금리로는 돈을 쓸 엄두를 못 낸다고 한다. 조 사장은 은행이자 낼 돈은 고사하고, 제품 생산을 위한 자재비조차 구할 수 없게 되자 결국 워크아웃이라는 마지막 선택을 했다. 기업을 살리려면 어쩔 수 없었다. 8월 18일 코막중공업은 키코 가입 2년 만에 워크아웃 기업으로 몰락했다.
"회사가 없어지지 않아 다행이지요. 주변에서 보니 키코에 물려 파산, 폐업을 한 업체들도 꽤 있더라고요. 이제 워크아웃 들어갔으니 잘 관리 받아서 회생해야죠."
 
키코 탈출한 회사 "은행 용서 못해"

코멕스아이엔씨의 석찬징 대표는 2008년 외환은행과 신한은행에서 가입한 키코로 인해 약 188억원의 손실을 입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을 "행운아"라고 불렀다. 키코의 수렁에 빠졌음에도 회사는 살았기 때문이다.

그는 아직도 은행에 대해 분노하고 있었다. 달러로 물건을 사서, 달러로 되파는 태양광 소재 무역을 하는 회사 성격상 그에겐 환전이나 환율 관리가 크게 필요치 않았다.
"중소기업 사정상 재무 전문가를 둘 수 있는 상황이 아니죠. 그런 상황에서 은행에 많은 걸 의존하는 게 현실입니다. 거기다가 친분이 있는 은행관계자라면 더 믿게 되지요."

그는 은행에 대한 믿음과 친분이 자신을 키코의 수렁에 빠지게 했다고 말했다.

"2007년 말에 한 10년 거래로 친분이 있던 신한은행 모 선릉지점장이 회사로 찾아와 '지금 환율 900원을 대비해야 한다'며 키코를 설명하더군요. 설명을 하면서도 그냥 '환 관리한다'는 말만 할 뿐 그 역시 키코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것 같더군요. 필요없다고 했는데도 계속 찾아와 키코 가입을 권했죠. 마지막엔 '자기 얼굴 봐서 들어달라'며 '어느어느 기업이 이걸로 돈벌었다'는 말까지 했습니다. 은행과 그분을 믿고 들었습니다. 외환은행 역시 친구의 친구가 친분을 내세워 어쩔 수 없이 키코에 가입하게 됐어요."

그는 "키코 가입 당시 환율 상승으로 인해 막대한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신
한과 외환 두 은행 어느 쪽에서도 듣지 못했다"고 했다. 심지어 자신을 찾아왔던 은행직원들로부터 녹인이니 녹아웃 같은 개념도 설명받지 못했다고 했다.

그가 든 키코 역시 막대한 손실을 발생시켰다. 손실이 눈덩이처럼 불어나자 은행 직원들은 키코 손실을 만회할 수 있는 방법이라며 선물환을 제안했지만 선물환으로 인해 손실은 오히려 더 커졌다. 2008년 9월과 10월 선물환으로만 단 두 달 새 100억원대의 손실을 입었다. 키코와 선물환을 통해 무려 290억원 가까운 손실을 입은 것이다. 이렇게 큰 피해에도 그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 4000억원 가까운 매출과 탄탄했던 재무구조, 마침 최고의 호황을 보이고 있는 태양광 소재 사업이 그를 키코의 늪에서 건져 올렸다. 석 대표는 "현금흐름이 좋았고, 은행거래가 별로 없어 부채로 쌓일 만한 게 없었기에 살아날 수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키코의 수렁에서 탈출했지만 돈보다 더 큰 것을 잃어야만 했다. 아내가 암 3기 판정을 받은 것이다. 그는 "키코 가입 후 아내를 너무 힘들게 한 것이 원인"이라고 자책하며 눈물을 보였다.

"은행이 카지노처럼 장사"

"병원에서 극심한 스트레스가 큰 원인이라고 하더군요. 키코와 선물환 손실이 200억원을 넘어가던 2008년 말부터 제가 자살 생각을 했어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죠. 제 행동들이 이상했는지 아내가 눈치를 챘습니다. '돈 때문에 고민하지 말라'고 하더군요. 그때부터 1시간에 한 번, 조금 한가한 시간에는 10분에 한 번씩 제게 전화를 했어요. 제가 자살할까 봐요. 아마 그것 때문인 것 같아요."

대화 내내 "휴~" 하는 한숨을 수없이 많이 쏟아냈던 석 대표. 그는 중소기업을 도와주는 존재라고 생각했던 은행에 '배신을 당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현재 은행을 상대로 키코 소송을 진행 중이다. 자신은 키코의 악몽을 벗어났지만 은행이 보여준 행동들을 참을 수 없었다고 했다.
"소송을 하니 은행직원이 찾아와선 20억원을 무담보로 빌려줄 테니 소송하지 말아달라고 하더군요. 그 정도는 늘 보유하고 있어 빌릴 필요가 없으니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그는 몇 년이 됐든 이번 소송의 끝을 보겠다는 입장이다. 은행을 향한 감정의 골이 매우 깊은 듯했다. 인터뷰 말미 그는 "은행이 카지노처럼 장사를 하면 안된다"는 말도 했다.

키코 취재 중 만난 대부분의 중소기업인들과 중소기업 임원들은 "키코는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했다. 하지만 회사나 자신들의 이름이 언론에 거론되는 것이 두렵다고 말하는 이들도 많았다. 여전히 은행과 거래를 해야 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들은 "은행은 기업에 언제나 갑(甲)일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입을 모았다.


▶ 키코란 

'약정 환율' 넘으면 넘을수록 손실 눈덩이

키코(KIKO)는 영문 'Knock-In, Knock-Out'의 알파벳 앞 글자들을 조합해 부르는 통화옵션파생상품이다.

키코를 파는 은행은 계약자들과 계약 시 환율이 뛰거나 떨어져도 정해진 계약 금액 만큼은 사전에 약속된 환율로 계산해주는 기준 환율을 우선 정한다. 그리고 환율 변동구간의 최상단인 녹인(Knock-In) 환율과 최하단인 녹아웃(Knock-Out) 환율을 설정한다. 주로 키코에 가입한 수출기업들은 수출대금으로 받는 달러 환율이 계약 시 약정된 '녹아웃환율 - 기준환율 - 녹인환율'구간 안에서 기준 환율보다 하락했을 때 미리 약정된 기준 환율을 적용 받을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하지만 계약자 입장에서 키코의 함정은 녹인, 녹아웃 구간 설정에 있다. 계약 만기 시까지 환율이 최하단 녹아웃 아래로 한 번이라도 떨어면 계약이 자동으로 상실돼 키코 계약자는 환율 헤지의 기능을 잃게 된다. 반대로 환율이 만기 시까지 최상단 녹인 환율을 단 한 번이라도 넘어서면 계약자는 계약 시 정한 레버리지 비율과 상승한 환율만큼 손실을 입게 되는 구조다.

키코가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통상 1990년대 중후반 해외에서 등장한 키코가 한국에는 2005년 중후반 도입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외국계 은행인 한국씨티은행과 제일은행이 키코 도입 초기 시장을 주도했고 2007년 중후반 이후 거의 모든 시중은행들이 키코 판매에 열을 올렸다. 초기에는 키코(KIKO)라는 이름이 아닌 코키(KOKI)로 불렸다고 한다. 이유는 환율 구간의 좌측에 녹아웃 환율이 자리하고 우측에 녹인 환율이 위치하고 있어 순서상 'KOKI'였다고 한다. 이것이 언제부터인지 KIKO로 불렸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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