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정은 회장을 비롯한 현대그룹의 고위 관계자들은 틈만나면 현대건설 인수 의지를 밝혀왔다. 현대그룹 분위기는 현대건설 인수에 그룹의 사활을 걸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다.

현대그룹이 최근 재무구조조정 약정을 거부하며 주채권 은행인 외환은행과 '벼랑끝 대립'을 불사하는 것도 결국은 현대건설 인수 문제 때문이다. 채권단 요구대로 재무구조조정 약정을 맺게 되면 모든 신규 투자가 중단돼 현대건설 인수전에는 아예 참가조차 못하기 때문이다.

현대그룹이 현대건설 인수에 매달리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다. 현대그룹이 대외적으로 내세우는 논리는 현대그룹의 사업구조, 특히 대북사업과 시너지를 낼 수 있는 기업이 바로 현대건설이라는 점이다.

대북사업은 고(故) 정주영 명예회장과 현 회장의 남편인 고 (故) 정몽헌 회장의 유지(遺志)가 담긴 분야로, 대북사업 독점권을 갖고 있는 현대로서는 북한의 사회인프라(SOC) 건설 기회를 살릴 수 있는 건설 계열사가 긴요하다는 것이다.

현대그룹의 정통성을 승계한다는 명분도 인수를 주장하는 한 이유다. 현대건설은 현대그룹의 모태가 된 기업이다. 현대건설의 마지막 오너가 현정은 회장의 남편인 고(故) 정몽헌 회장이었다. 2000년 당시 현대건설은 현대가(家) 형제들간의 후계갈등과 대북송금 사건의 여파 등으로 경영이 악화됐고 2001년 6월 채권단 공동관리로 넘어갔다.

당시 고(故) 정주영 명예회장과 정몽헌 회장 부자는 개인재산 3800억원을 내놓으면서까지 현대건설을 지키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결국 경영권을 내주고 말았다. 현 회장에게 현대건설은 단순한 건설사가 아니라 시아버지와 남편의 눈물이 서린 기업이고, 이를 인수하는 것은 현대가의 적통(嫡統)을 잇는다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현대그룹에게 현대건설이 중요한 또 다른 이유는 현대건설이 보유한 현대상선 지분 8.3%가 현대그룹의 경영권에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현대그룹 계열사 가운데 '핵심 중 핵심'이 현대상선이다. 현대상선은 현대그룹 계열사 대부분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어 사실상 그룹의 지주회사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런데 현대상선의 지분 중 31.45%를 이른바 범(凡)현대가(家)로 불리는 현대중공업그룹(25.47%)과 KCC(5.98%)가 갖고 있다. 현정은 회장과 범현대가는 이미 세 차례 경영권 분쟁을 겪으며 사이가 틀어진 상태다.

만약 현대중공업이 현대건설을 인수해 현대상선 지분을 추가로 가져가고 KCC가 측면 지원에 나선다면 현대중공업이 현대상선의 경영권을 위협할 수도 있다. 이는 현대그룹 지배권에도 연쇄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이런 이유들로 해서 현대건설 인수는 현대그룹 입장에서는 '하면 좋고 안돼도 어쩔 수 없는' 차원이 아닌 그룹의 소유권이 걸린 중대한 사안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