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경기를 보면 무엇보다 시청자의 눈을 사로잡는 것은 화려한 색(色)이다. 선수의 유니폼도, 응원 팬의 의상도 각각 뚜렷한 색깔로 녹색 잔디와 대비를 이룬다. 이렇게 다양한 색채들이 생동감 넘치는 경기와 어울리면, 시청자들의 감정도 한껏 고양(高揚)된다. 실제로 과학자들은 색이 사람에 미치는 다양한 효과를 분석하고, 자연 속에서 일으키는 복잡한 상호작용까지 연구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같은 색도 남녀가 느끼는 감각이 다르다?

색채 감각에 대해 과학자들이 밝혀낸 기본 상식은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이다. 특히 남녀 간에 다르다. 예를 들어 길거리 응원에 입을 붉은색 옷을 한 커플이 쇼핑한다고 하자. 이때 여자들이 시간을 끌어도 남자들은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게 좋다. 단순히 남자여서가 아니라 여자들이 느끼는 붉은색은 남자들이 느끼는 붉은색보다 훨씬 복잡하기 때문이다.

미국 애리조나주립대 연구팀이 미국 인간 유전학 저널(American Journal of Human Genetics)에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여자는 오렌지색·진홍색· 와인색 등 다양한 붉은색을 유전적으로 남자보다 더 잘 구별해낸다. 연구팀에 따르면 붉은색을 알아보는 유전자(OPN1LW)는 유독 돌연변이가 많으며, 성염색체인 X 염색체 위에 존재한다. 인간의 성염색체는 남성은 XY, 여성은 XX염색체로 이뤄진다. 따라서 여성은 붉은색을 구별하는 유전자를 남성보다 두 배나 갖고 있다. 이 연구 결과는 전 세계 236명의 DNA를 분석해 얻었다.

붉은색 옷을 입은 외국인들이 지난 12일 서울 시청 앞 서울광장에서 거리 응원을 펼치고 있다. 최근 과학자들은 색채를 느끼는 능력이 유전에 따라 남녀별로 다르며, 색채가 시각은 물론 미각이나 심리 상태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 결과를 잇달아 내놓고 있다.

여성이 이런 유전적인 특성을 갖고 있는 이유는 옛 인류의 관습에서 비롯됐다는 설명이 많다. 영국 뉴캐슬대 연구팀은 여성이 남성보다 붉은색을 잘 알아보고 선호하는 이유에 대해 고대 인류가 채집생활을 할 당시 더 붉고 싱싱한 과일을 모으는 여성들이 경쟁력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 여성들의 유전적인 특성들이 후손들에까지 전달됐다는 것이다.

◆맛도, 머리도 좋게 만드는 색의 비밀

그렇다고 색채감각이 단순히 고대의 유물만은 아니다. 과학자들에 따르면 오히려 색채감각은 갈수록 쓸모가 커지고 있다. 최근 과학자들은 색이 단순히 시각적인 즐거움뿐만 아니라 미각이나 인지 능력까지 향상시킬 수 있다는 연구결과를 속속 내놓고 있다.

독일 요하네스 구텐베르크 연구소는 최근 실험자들에게 다양한 빛깔의 조명에서 와인을 마시도록 한 결과, 특정 빛깔의 조명에서 단맛을 더 강하게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예를 들어 붉은색 조명 아래에서 실험자들은 흰색·녹색 조명 아래에서보다 1.5배 더 와인이 달다고 느꼈다. 이 연구의 실험에는 모두 500명이 참가했다. 다니엘 오버필드(Oberfield) 연구원은 "여러개의 와인을 맛보는 와인 테이스팅(와인 시음행사)은 중립적인 조명 아래에서 실시해야 비교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존스홉킨스대 연구팀은 색채가 인간의 인지 능력도 향상시킨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월드컵과 같은 운동경기다. 연구팀에 따르면 원래 인간은 3개 이상의 대상을 동시에 인식할 수 없다. 그러나 축구만 해도 한 경기장에 선수 22명이 뛰고 심판에 감독, 코치들까지 있지만 관중들은 무리 없이 경기를 즐긴다. 이는 서로 다른 색깔의 옷을 입고 있기 때문이다. 저스틴 할베다(Halberda) 박사는 "사람은 서로 다른 색깔의 물체들이 보일 경우 한 색으로 통일된 물체들보다 머릿속에 쉽게 정리하고 인식한다"며 "실험 결과 색깔에 따라 최대 한 번에 70개 대상까지도 인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말했다.

◆자연 속에서는 생존 가르는 열쇠 되기도

동·식물에 색채가 미치는 영향도 연구가 활발하다. 동·식물에 색채는 아예 생존을 가르는 중요한 열쇠가 되기도 한다. 암컷에게 구애하는 수컷은 화려한 색채로 자신을 치장한다. 또 천적을 피하는 과정에서 색채를 바꾸며 진화하기도 한다.

핀란드 쿼피오대 연구팀은 최근 미국과 아시아에는 붉은색 단풍나무가 많지만, 유럽에는 거의 없는 현상을 연구해 3500만여년 전부터 해충을 피하기 위해 치열하게 진화한 결과임을 밝혀냈다. 연구팀에 따르면 붉은색 단풍잎은 붉은색 색소를 만드는 과정에서 영양분이 적어지며, 진딧물과 같은 해충에게 덜 매력적이 된다. 미국과 아시아의 나무는 이런 효과 때문에 붉은색으로 물들도록 진화했다.

그러나 유럽의 경우 지형적인 요인 때문에 이런 진화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밝혔다. 자르모 홀로파이넨(Holopainen) 교수는 "유럽은 알프스 산맥이 가로막고 있어 빙하기에 가벼운 나무 종자는 남쪽으로 내려온 반면 해충은 내려오지 못했다"며 "결국 유럽 나무들은 붉은 색소를 만들 필요가 없어져, 이전처럼 노랗게 물들게 됐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