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 기운을 받으려는 사람들이 오면서 주말엔 2000원짜리 저금통이 20~30개씩 나갑니다."
경남 진주 남강을 건너 북쪽으로 20분쯤 차를 달리자 한국 재계의 거목인 호암 이병철 삼성 창업주의 생가(生家)가 눈에 들어왔다. 행정구역은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
호암 생가로 이어지는 골목 어귀에서 매점을 운영하는 이무희(70)씨는 "요즘 호암 생가를 찾는 손님들이 부쩍 늘었다"고 말했다. 의령군의 거듭된 요청으로 지난 2007년 11월 호암재단측이 호암 생가를 일반에 개방하면서 이 곳을 찾는 사람이 크게 늘었다는 설명이다.
호암 생가에서 걸어서 7~8분 거리에 있는 고깃집도 손님이 늘었다고 반색했다. 임미연(45) 사장은 "주말엔 1000명 정도의 손님이 오는데 이 중 3분의 1은 호암 생가를 들렀다가 오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의령군은 올해 호암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2010년을 '호암 생가 방문의 해'로 정하고 전국적으로 호암 생가를 알리는 홍보행사를 대대적으로 벌이고 있다. 호암생가를 관리하는 이무형 소장은 "날씨 좋을 때는 주중에 수백 명, 주말엔 1000명 가까이 사람들이 왔다 간다"며 "개방 후 지금까지 호암 생가에 약 20만 명이 다녀간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 '떡채 바위' 명물 중 명물
호암의 생가에 들어서자, 비가 오는 가운데도 10여명의 방문객이 우산을 받쳐들고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있었다. 부산에서 왔다는 방문객은 "지난는 길에 들렀는데 우리도 부자가 됐으면 좋겠다"며 웃었다.
호암 생가는 대문쪽에서부터 대문채, 사랑채, 안채 순으로 들어서 있다. 대문채는 대문 양쪽에 방이 하나씩 배치돼 있다. 호암은 가장 안쪽에 있는 안채에서 태어났다.
안채 왼편에는 커다란 암반이 눈에 들어왔는 데 언뜻보기에도 모양이 예사롭지 않았다. 이무형 소장은 "이 바위에는 재물과 부귀를 뜻하는 수 많은 동물 그림이 숨어 있다"고 설명했다.
이 바위의 가장 밑 부분은 '떡채바위'로 불리는데 시루떡을 쌓아놓은 모습이라 해서 붙여졌다고 한다. 자세히 보면 '밭 전(田)'자 모양으로도 보였다. 아닌 게 아니라 이 소장의 설명처럼 바위에는 여러 가지 동물을 닮은 모습이 숨어 있었다. 거북이와 두꺼비, 자라 등 모두 재물과 연관이 있는 동물 그림이었다.
암반 오른쪽에도 특이한 형상이 있었다. 언뜻보면 주판알처럼 보이기도 하고, 달리 보면 쌀마가니를 쌓아놓은 것과도 비슷했다. 이 소장은 "방문객들이 떡채바위를 꼭 한번씩 쓰다듬고 간다"고 말했다. 그런 탓인지 바위 윗부분은 반들반들한 상태였다.
'떡채바위'의 영험때문이었을까. 호암의 집안은 아버지 때에도 천석꾼 부자였다. 정종규(72) 의령군 문화관광 해설사는 "호암의 조부와 아버지는 말이나 소를 타며 곳곳에 흩어진 농장을 둘러볼 정도로 부자였다"면서 "이때 호암도 조부와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농장 관리법을 배웠다"고 말했다.
◆'통큰 구두쇠' 만우 조홍제
호암과 함께 또 다른 재계의 큰 인물인 만우 조홍제 효성그룹 창업주의 생가는 호암의 생가에서 직선 거리로 15㎞쯤 떨어져 있었다. 군북역에서 동남쪽으로 700m쯤 들어간 논 한복판에 있었다.
만우의 생가는 사랑채, 안채 등 총 4칸으로 구성돼 있다. 주변 집들에 비하면 단연 돋보이지만 수 백평이 넘어 보이는 대지 면적에 비하면 아담한 분위기가 묻어났다. 생가 내부는 깔끔하게 정돈돼 있었고 잔디도 잘 다듬어져 있었다.
호암 생가처럼 전문 관리인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만우의 먼 친척인 조봉양(87)씨가 이 집에서 생활하면서 손수 관리하고 있다. 또 효성의 창원공단 직원들도 한 달에 한번쯤 찾아와 집안 청소를 도와주고 있다.
만우는 생가 주변에 땅이 많았는데 사업을 시작하면서 대부분 정리해 지금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고 한다. 인근 주민들에 따르면 만우는 자신의 땅에 소작인들이 집을 지어 살 수 있게 했다. 함안군에서 만난 조극래(60)씨는 "현재 만우 생가 주변의 200가구 중 5~6가구는 아직도 땅이 조씨 일가 소유"라고 말했다.
만우 생가에서 200m쯤 떨어진 곳에는 세 채의 정자와 재실(齎室)이 있다. 논 가운데 만들어진 이들 정자는 'ㄷ'자 모양으로 만들어져 있다. 이들 3개의 정자는 만우 부친과 만우, 그리고 만우의 아들인 조석래 회장이 각각 자신의 아버지를 위해 지은 것이다. 조극래씨는 "돈이 많아도 마음이 있어야 짓는 것 아니겠나"라고 말했다.
만우도 당시 천석꾼 이상의 부자였지만 생활은 무척 검소했다고 한다. 마을에서 만난 한 주민은 "만우는 논이나 들에 나갔다가 빈 지게로 돌아오는 머슴들이 있으면 크게 혼을 냈다"며 "돌멩이 하나를 들고 오더라도 빈 손으로는 절대 못 들어오게 할 만큼 생활이 알뜰하고 남달랐다"고 말했다.
만우의 별명은 '샌님', '구두쇠' 등이다. 그러나 평범한 구두쇠가 아니라 '통큰 구두쇠'였다. 만우는1950년대부터 영남장학회에 장학금을 전달하고 함안군에 운동장과 체육관도 지어줬다.
함안군에 있는 군북초등학교엔 실내 체육관도 세웠다. 만우가 1974년에 만든 이 실내 체육관은 만우의 장남인 조석래 회장이 2002년에 개축했다. 이 학교 정문 옆엔 이를 기리는 비(碑)가 세워져 있다. 만우는 이처럼 '통 큰' 기부는 많이 했지만 별세했을 때 신발장에 밑창이 닳은 구두가 가득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로 전해진다.
만우는 16살까지 서당에 다니다가 17살이 돼서야 신학문을 배우러 서울로 진학했다. 이 때문에 학교 졸업은 물론 사업시작도 연암이나 호암에 비해 늦어 아호를 만우(晩愚·늦되고 어리석다)라고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