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나무야말로 한국 재계의 뿌리라고 할 수 있죠. 벌써 90년째 저렇게 굳건히 버티는 걸 보니 참 대단합니다."

경남 진주시내에서 차로 20분쯤 떨어진 지수면의 옛 지수초등학교 교정에서 만난 정영조 신지수초등학교 교장은 소나무를 가리켰다. 지은 지 90년이 넘은 교사(校舍) 앞에 떡 버티고 서 있는 소나무는 건물 높이보다 높게 자라있었다. 원래 나무는 두 그루지만 언제부턴가 뿌리가 합쳐져 지금은 한 그루처럼 보였다.

정 교장은 "1921년 5월 개교 이후 연암 구인회 LG창업주와 호암 이병철 삼성 창업주가 나란히 한 그루씩 심었다고 해 '재벌송(財閥松)'이라고도 불린다"고 했다.

산골의 작은 초등학교를 빛낸 재계 인물은 두 사람만이 아니다. 연암의 동생인 구철회 LG그룹 창업고문과 허정구삼양통상 명예회장, 허준구GS건설 명예회장도 이 학교에서 공부했다. 연암의 장남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도 이 학교 출신이다. 그야말로 한국 재계의 산실(産室)인 셈이다.

초등학교 동급생 호암과 연암

옛 지수초등학교를 빠져나와 1㎞쯤 떨어진 신지수초등학교로 발길을 옮긴 정 교장은 교무실로 들어가자마자 빛바랜 서류철을 꺼냈다. 이 학교가 보관하고 있는 지수초등학교의 수료대장(일종의 출석부). 1922년도 대장을 펼치자 '6번 구인회', '26번 이병철'이란 이름이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당시 자료가 남아있는 것이 별로 없지만 연암과 호암은 같은 반에서 공부하던 사이였던 것만은 확실하죠."

경남 진주시내에서 차로 20분쯤 떨어진 지수초등학교. 1921년 개교한 뒤 구인회 LG 창업주와 이병철 삼성 창업주, 구철회 LG그룹 창업고문과 허정구 전 삼양통상 명예회장, 허준구 전 GS건설 명예회장,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 등을 배출한 재계의 산실이다.

1907년에 태어난 연암은 한학을 공부하다가 21년 지수초등학교에 2학년으로 편입해 24년까지 다녔다. 연암보다 세 살 아래였던 호암도 한학을 배우던 중 1922년 3월 이 학교로 편입해 6개월간 다니다 서울로 전학했다.

연암과 호암이 함께 뛰어놀던 지수초등학교는 이제 더 이상 학생들이 없다. 학생 수가 줄면서 지난해 3월 1일자로 '송정초등학교'로 통폐합됐다. 송정초등학교는 이후 이름을 지수초등학교(신(新)지수초등학교)로 바꾸고 연암과 호암의 수료대장도 관리하면서 '대기업 창업주를 배출한 학교'란 이미지를 이어가고 있다. 신지수초등학교는 연암과 호암의 소나무 얘기를 '꿈을 키우는 지수 어린이'란 교재에 담아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있었다.

남강을 가로지르는 정암교 밑 솥바위. 반경 8㎞ 안에 호암 이병철 삼성 창업주와 연암 구인회 LG 창업주, 만우 조홍제 효성그룹 회장의 생가가 있다.

LG·GS 등 복지관, 공원 만들어 기증

지수초등학교 운동장엔 연암의 장남인 구자경 명예회장이 2002년에 지은 체육관이 있다. 체육관 이름은 구 명예회장의 아호를 딴 '상남관'. 이곳은 낮엔 신지수초등학교 아이들이 체육관으로 사용하고 밤이면 인근 주민들이 이용하고 있다. 연암의 생가는 옛 지수초등학교와 300m 정도 떨어져 있었다. 걸어서 5분쯤 걸리는 거리. 경남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에 있는 호암 생가는 학교에서 직선으로 10㎞쯤 떨어져 있었다. 호암재단측에 따르면 호암의 누이가 진주시 사봉면으로 시집갔고, 호암은 학교에서 가까운 누이의 집에서 학교를 다녔다고 한다.

지수초등학교의 또 다른 졸업생인 허준구 전 GS건설 명예회장의 생가도 연암의 생가에서 멀지 않았다. 연암의 생가를 둘러보고, 대로변으로 나오자 약 3300㎡(1000평) 정도의 자그마한 공원이 보였다. 이 공원 중앙에 있는 안내문엔 '부모님 생전의 뜻을 받들어 이 공원을 만들었습니다. 항상 고향을 사랑하셨던 마음을 담아 한 그루의 감나무를 심습니다'라고 적혀 있다.

공원 옆에는 한옥 스타일로 만든 경로당도 있는데, 공원과 경로당은 허씨 가문이 만들어 기증한 것. 구자경 명예회장도 '상남복지회관'을 만들어 진양군(현재 진주시에 통합)에 기증했다. 2층으로 지어진 건물은 어린이집과 경로당으로 쓰고 있었다.

진주시 지수면에 나란히 자리 잡고 있는 연암 구인회와 효주 허만정의 생가 전경. 왼쪽 두 채는 구씨 일가의 집이고 오른쪽으로 50m쯤 떨어진 곳에 허씨 일가의 집이 있다.

200년 만에 실현된 '솥바위' 전설

옛 지수초등학교에서 호암의 생가가 있는 의령군 방향으로 차를 타고 20분쯤 달리면 남강을 가로지르는 정암교라는 다리가 나온다. 다리 밑에는 바위가 하나 있는데 물이 적을 때는 바위 아랫부분까지 보이는데 다리가 세 개인 솥처럼 생겼다고 해서 솥바위로 불린다.

200년 전 한 도인이 배를 타고 남강을 건너다 "솥바위를 중심으로 반경 20리(8㎞) 안에서 큰 부자 3명이 나올 것"이라고 예언했다는 전설이 주민들 사이에 전해내려온다. 일부 주민들은 진주시의 연암, 의령군의 호암, 함안군의 만우 조홍제 효성그룹 회장을 통해 솥바위의 예언이 실현됐다고 믿고 있다. 주민들은 솥바위의 세 다리의 방향이 각각 호암, 연암, 만우의 생가 방향을 가리킨다고 하는데 실제 지도상으로도 바위를 중심으로 호암, 연암, 만우의 집이 각각 8㎞쯤 떨어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