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는 항상 승자와 패자를 가려낸다. 전쟁이 그렇고, 경제위기도 그렇다. 남유럽 경제위기도 예외가 아니다. 전세계적으로는 아시아와 미국을 승자로, EU(유럽연합)를 패자로 만들었다. EU 내부적으로는 독일을 승자로, 그리스와 포르투갈, 스페인 등 남유럽 국가들을 패자로 만들었다.

세계 4대 경제강국인 독일은 이번 남유럽 사태를 계기로 EU 맹주로서의 입지를 더욱 확고하게 만들었다. 전세계 주가는 그리스 사태에 대해 독일인들이 싸늘한 반응을 보이면 폭락했고, 독일인들의 굳은 얼굴이 풀리면 올랐다. 유럽 언론들은 연일 "앙겔라 메르켈(Merkel) 독일 총리의 리더십이 시험대에 올랐다"는 보도를 쏟아냈다. 메르켈 총리의 소극적인 태도에 EU 내 독일 리더십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지만 이는 EU 내 독일의 비중이 그만큼 크다는 반증이다.

독일은 이번 사태를 촉발한 그리스에 비해 역사가 턱없이 짧고, 포르투갈이나 스페인보다 더 늦게 근대국가를 형성했다. 해외시장 개척의 역사도 포르투갈이나 스페인 보다 늦다. 프랑스처럼 옥토가 넓어 먹거리가 풍부한 나라도 아니다. 척박한 땅에서 못살던 독일인들이 어떻게 수많은 유럽국가들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맹주로 등장했을까? 한국과 독일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남유럽 사태를 지켜보면서 한국인인 필자의 관심을 끈 것은 이 대목이다.

독일의 국력을 분석하기 위해 독일 외무부가 발간한 '독일 안내'(Tatsachen Ueber Deutschland)를 찾아 봤다. 유럽에서 세계대전을 2차례나 일으켜 수많은 유럽인들이 목숨을 잃게 만든 '유럽의 악동' 독일이 EU 내 리더로 등장한 비결은 크게 3가지였다. 가장 중요한 비결은 독일의 과학기술과 혁신 능력이다. 독일인이 자랑스러워하는 발명·발견과 혁신의 리스트는 매우 길었다. 수학자·화학자·물리학자·기계공학자·발명가·건축가·전자공학자·엔지니어 등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필생의 역작들이다. 전체 목록을 살펴보자.

두발 자전거(칼 폰 드라이스·1817년), 진공 백열등 원형(하인리히 괴벨·1854), 전화의 모태가 된 음성과 문자의 전자기파 변환 전송(필립 라이스·1861), 흡입-압축-폭발-배기의 4박자 내연엔진(니콜라우스 아우구스트 오토·1876), 냉장고(칼 폰 린데·1876), 탄저균·결핵균·콜레라균 발견(하인리히 코흐·1877~83), 자동차(칼 벤츠와 코트프리트 다임러·1885), 글라이더 비행기(오토 릴리엔탈·1891), X선(빌헬름 뢴트겐·1895), '기적의 약' 아스피린(펠릭스 호프만·1897).

20세기에도 이 행진은 이어진다. 상대성이론(알베르트 아인슈타인·1905), 자기부상열차 아이디어(헤르만 켐퍼·1933), 제트엔진(1939·한스 폰 오하인), 컴퓨터와 디지털시대의 모태가 된 최초의 이진법 계산기 'Z3'(콘라트 추제·1941), 바코드와 스캐너(루돌프 헬·1963), 신용카드 등에 사용되는 IC칩 카드(위르겐 데트로프·1969), LCD 소자(1976), 나노기술을 가능하게 한 주사형 터널링 현미경(1986·게르트 비니히), MP3의 기초가 된 오디오 압축기술(프라운호퍼 연구소·1995), 연료전지차(자동차 회사 벤츠·1994), 컴퓨터 하드디스크를 가능하게 한 거대자기저항 원리 발견(페터 그륀베르크·프랑스 알베르 페르와 공동작업·1998).

발견자 혹은 발명자들의 일부는 노벨상을 받았다. 20세기 초에는 노벨상의 3분이 1이 독일 차지였다. 그들의 혁신은 세계를 바꾸었다. 결핵균과 엑스레이의 발견, 제트엔진의 발명이 얼마나 인류의 삶을 바꾸어 놓았는가. 독일인들은 "수많은 독일 인재들이 20세기 중반에 히틀러 체제를 피해 미국으로 이주한 것은 독일에는 매우 큰 손실이었다"고 한탄한다.

두번째 비결은 독일연방공화국 초대 총리(1949~1963년 재직)였던 콘라트 아데나워의 친미(親美)·친서방(親西方) 정책이다. 2차대전 패전후 쑥밭이 된 독일을 이끌게 된 기독교민주당(CDU) 출신의 아데나워는 독일연방공화국 민주주의 역사의 첫 단추를 잘 끼워준 정치가로 평가받는다. 그는 미국과 영국·프랑스 등 서방국가들과 친밀한 외교정책을 구사해 독일을 고립주의에서 벗어나게 했다. 경제적으로는 미국 '마샬 플랜'을 잘 활용해 '라인강의 기적'을 이룩했다.

아데나워는 자유시장경제를 운영할 책임자로 프라이부르크대학 경제학과 교수인 에르하르트를 경제장관으로 임명, 사회적 시장경제를 도입하여 복지지향적 자본주의 국가를 건설했다. 공산주의 세력의 서진을 막기 위한 미국의 독일재건전략을 100% 활용해 독일을 다시 부활시켰다. 14년 장기집권하는 동안 자가용을 소유하지 않고, 공무차량을 쓰지 않을 경우 대중교통을 이용할 정도로 근검하고 청렴결백한 이미지로 실의에 빠진 독일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세번째 비결은 과거사 사죄를 통한 정치적 신뢰의 확보이다. 2차 대전의 원흉으로 낙인 찍힌 독일이 과거사 굴레를 벗어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사람은 빌리 브란트 총리(1969~1974년 재직)이다. 그는 히틀러 정권이 저지른 만행에 대해 주변국가에 화해하고 용서를 빌어 신뢰관계를 구축했다.

브란트 수상은 1970년 12월 폴란드에 옛 독일 영토 일부를 할애하는 오데르-나이세 국경선 확정 조약(바르샤바 조약) 서명 전에 공식적인 외교 행사로 바르샤바 근교에 있는 유대인 학살 묘비탑에 헌화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가운데 탑 앞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면서 억울하게 죽어간 영혼을 위로하는 독일지도자의 사죄 모습은 전세계에 보도됐다. 이러한 노력으로 유럽국가들은 독일의 진심을 믿게 됐고, 독일은 과거사의 부담에서 벗어나 통일을 이룩하고 유럽 내 정치적 리더십을 갖게 됐다.

이러한 역사적 흐름에 비추어 볼 때 독일의 지도자들이 남유럽 재정위기 사태에 대해 리더십을 상실하는 일은 없을 것 같다. 아데나워 총리가 2차례의 세계대전으로 수많은 유럽인들이 죽어간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1950년에 로베르 슈망 프랑스 외무장관과 함께 유럽석탄철강공동체 구상을 발표하면서 유럽통합의 역사를 열어간 정신을 잘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제위기가 심각해도 수백년 동안 유럽 지역을 역병처럼 휩쓸었던 전쟁보다 낫다는 것은 분명하다.

한국은 유럽의 맹주가 된 독일에 비해 무엇이 부족한가. 한국과 독일을 비교해 보자. 한국은 인구·지리·역사·문화 등 여러 방면에서 독일보다 못하지 않다. GDP(국내총생산)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인구는 독일이 8300만명, 한국은 7300만명(북한 포함)이다. 독일 역사의 기점은 843년 베르덩 조약이므로 5000년 역사의 한국 보다 훨씬 짧다. 독일어를 세계적 언어로 만든 철학자 칸트와 시인 괴테가 독일에 있다면 한국에는 이황과 이이, 세종대왕이 있다. 한국도 독일처럼 2차 대전 이후 세계 최강국인 미국의 동맹국이 되는 천재일우의 기회를 얻었다. 독일이 '라인강의 기적'을 이룩했다면 우리는 '한강의 기적'이 있다. 독일 처럼 사죄해야 할 과거사 부담도 없다.

하지만 독일의 최대 강점인 발명과 발견, 혁신 부문에 이르면 갑자기 거리가 확 벌어지는 느낌이다. 우리는 과연 독일인들이 자랑스럽게 길게 나열하는 발명·발견·혁신의 리스트를 갖고 있는가.

지난해 조선일보 경제부 김재곤 기자는 미국 JP모간자산운용의 폴 베이트먼(Bateman·63) 회장을 인터뷰한 적이 있다. 세계 각국을 수없이 돌아다닌 그는 "앞으로 20~30년내에 세계 5대 경제대국에 아시아가 3자리 이상 차지할 것"이라고 말했다. 20~30년 쯤 뒤에 세계 5강에는 미국·중국·일본·독일이 낄 가능성이 높다. 만약 한국이 아시아국가로서 나머지 한 자리를 차지하려면 독일과 엇비슷하거나 약간 아랫 수준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한국이 '제 2의 독일'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과학과 기술, 발명과 발견, 혁신에 그 해답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