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에서 천국으로.' 요즘 관가(官街)에서 농촌진흥청을 두고 하는 말이다.
작년 1월 김재수 청장이 부임했을 때 농촌진흥청의 처지는 정말 지옥 같았다. 2008년 1월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연구성과가 미미하고 기술진보 속도에 뒤처진다'는 이유로 농진청 폐지계획을 발표했기 때문이었다.
농진청은 농업기술을 개발하고 농촌에 기술을 전수하는 국책 연구기관으로 1962년 박정희 대통령(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시절 설립됐다. 탄생한 지 거의 반세기 만에 존폐 기로에 놓인 것이다.
"유일한 농업기술 국책 연구기관을 폐지하면 안 된다"는 여론이 일며 가까스로 폐지위기는 넘겼지만, 박사 인력이 국책 연구기관 중 가장 많은 900여명에 달한 농진청은 고심에 빠졌다.
김 청장 취임 후 상황이 바뀌기 시작했다. 34년간 농림수산식품부에서 농산물유통국장·기획조정실장 등으로 일하며 농진청을 지켜봐 온 김 청장은 취임하자마자 조직에 메스를 댔다. 직원을 300여명 줄였고, 산하 기관 수를 9개에서 4개로 감축했다. 현장의 목소리를 연구에 반영시키기 위해 홈페이지에서 농민들 아이디어를 24시간 받았다. 성과평가 하위 10%에 포함된 직원들에겐 6개월 특별교육을 실시했다.
1년 만에 조직은 환골탈태(換骨奪胎)했다. 작년 12월 한림대 의대와 세계 처음으로 누에고치에서 뽑아낸 인공고막을 개발했다. 인간장기 이식용 미니돼지, LED(발광다이오드) 농작 시스템, 감귤에서 뽑아낸 인공 피부물질 등 화제를 모으는 연구결과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지난달 19일 정부 부처를 포함한 39개 중앙행정기관에 대한 국무총리실 2009년 업무평가 결과 86점을 받아 1위를 차지했다. 폐지 대상에서 1등으로 올라선 비결은 무엇일까.
①조직에 절박감을 심다
김 청장은 6개월마다 2000여명 전 직원의 역량평가를 했다. 하위 10%에 포함된 직원들의 보직을 해임하고, 6개월간 특별교육을 받게 했다. 이 중에서 복귀자와 퇴직자를 가려냈다. 하위 20%에 포함된 직원들에겐 경고문을 보냈다. 김 청장은 "특별교육 대상자가 되는 창피를 면하기 위해서라도 직원들이 더 열심히 일하게 됐다"고 말했다.
한편으론 연구실적이 우수한 연구원의 얼굴과 농업기술 우수 지도사의 발 모형을 동판으로 떠서 건물 로비에 전시했다. 매년 명인(名人)을 한명씩 선정할 방침이다.
평가가 강화되며 직원들의 업무 의욕도 커졌다. 과학기술논문색인(SCI) 논문 수는 2006년 422건에서 작년 706건으로 67% 이상 늘었고, 작년 연구원 1인당 논문·특허출원 등 연구성과는 2007년에 비해 21% 증가했다. 작년 국가연구개발 100대 성과에서 농진청이 개발한 기술이 7개를 차지해 서울대(11개)에 이어 2위에 올랐다.
②군살을 빼다
김 청장은 2007년 2141명에 달하던 직원 수를 작년 말 현재 1843명으로 300명 가까이 줄였다. 국장급 이상 21명, 과장급 60명으로부터도 예외 없이 사표를 받았다. 빈자리는 농작업 로봇 연구원, 한의사, 마케팅 전문가 등 젊은 전문가 100여명으로 채웠다. 노조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2006년 '연구직급 구분 철폐'를 외치며 몇개월간 청장실 점거시위를 벌였던 강성 노조가 즉시 반발하고 나섰다. 노조는 직원들에게 문자메시지와 이메일로 '김 청장이 업적 욕심에 조직을 희생시키려 한다'고 보냈다. 조직원 85%가 개혁에 반대한다는 설문조사 결과를 내세우기도 했다. 여의도 국회 앞에서 피켓시위를 벌였다.
김 청장은 원칙으로 맞섰다. 그는 "노조위원장도 직원평가 점수가 낮게 나왔지만 특별교육 프로그램에 내려보냈다"며 "예외와 특혜가 있으면 직원들이 개혁에 동의할 수 없다"고 말했다. 각종 인맥을 통해 들어오는 봐주기 청탁도 모두 거절했다고 한다. 대화로 설득도 했다. 김 청장은 "초급 직원들과 대화하는 '주니어보드'를 분기마다 실시해 '변화만이 살 길'임을 설득시켰다"고 했다.
③생각의 벽을 넘다
지난달 농진청엔 미대 디자인과 교수가 와서 농업기술에서 디자인의 중요성에 관한 특강을 했다. '창의'를 주제로 충무로 영화제작자 30여명과 연구원들 간의 토론회가 열리기도 했다. 김 청장은 취임 후 연구분야에만 파묻혀 지내는 농진청 연구원들의 시야를 넓혀 주기 위해 '도시락 포럼'을 시작했다. 시간이 부족한 연구원들이 점심 도시락을 먹으며 문화·사회 각계 전문가의 강의를 듣게 한 것이다. 김 청장은 "다른 분야와 소통하지 않으면 유용한 기술이 나올 수 없다"며 "취임 후 기계연구원 등 45개 연구기관·기업 등과 공동연구 협약을 맺었다"고 말했다. 부서 간 높은 벽도 허물었다. 부서별로 이뤄지던 연구과제를 부서통합 과제로 만들어 관련 인력이 기동성 있게 모여 합동연구를 할 수 있게 했다.
④현장 목소리 경청
농민들의 아이디어를 연구개발에 적극 수용하는 '온팜(On-farm)리서치' 제도를 실시했다. 농진청 홈페이지에 인터넷 접수창구를 개설해 24시간 농민들의 아이디어를 받았다. 그 결과 2006년 328건에 그쳤던 농민 아이디어 제안 건수는 작년 667건으로 두배 이상 늘었다.
농민 아이디어를 취합한 결과 바닷물을 이용한 친환경 농산물 생산기술 개발과 화력발전소의 남는 열을 온실난방으로 사용하는 방안, 수벌 번데기의 의약품·식품화 등 유용한 과제들이 나왔다. 농진청은 이 과제들을 내년까지 개발완료할 계획이다. 김 청장도 관용차가 1년여 동안 10만㎞를 뛰었을 정도로 휴일 없이 현장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다.
⑤선진국 수준되려면 과제 많아
김 청장은 "미국의 농업기술 수준을 100으로 봤을 때 한국은 아직도 70 정도에 그친다"며 "2013년까지 90까지 올리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이에 농진청은 지난달 초 외부 전문가가 참여한 20명의 선정위원회를 열고 '억새풀 같은 식물을 이용한 바이오연료 생산기술' 등 100대 농업기술을 선정했다. 선진 기술을 개발하기 위한 전문 연구인력 충원도 해결해야 할 과제다.
김 청장은 "농진청 직원들은 연구원이기 이전에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공무원들"이라며 "1년에 들어오는 민원 건수만 2만건이 넘는데 서비스 정신을 더 많이 갖춰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