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신용카드 발급장수가 7년 만에 다시 1억장을 돌파했다. 경제활동인구 1명당 4장 이상의 카드를 소유하고 있는 셈이다. 신용카드로 4000원짜리 커피를 사 마시고, 택시요금은 물론 각종 공과금도 납부할 수 있는 세상이다. 그러나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처럼 은행에선 카드가 통하지 않는다. 신용카드 발급을 적극적으로 권유하는 은행들이 정작 자기네들은 카드 결제를 기피하고 있어 소비자들의 불만이 높아지고 있다.

◆골드바 판매 은행, "카드결제 불가"

경기도 일산에 사는 직장인 김모씨는 최근 부모의 회갑 선물로 금지금(金地金ㆍ순도 99.5% 이상 금괴와 골드바)을 구입하기 위해 한 시중은행 지점을 찾았다. 김씨가 100g짜리 골드바를 신용카드로 구매하겠다고 하자 갑자기 은행 직원의 얼굴이 굳어졌다.

직원은 "금이 현금처럼 사용될 수 있기 때문에 카드 결제를 허용하면 '카드깡'이 만연할 수 있다"며 난색을 표했다. 김씨는 "그럼 현금으로 결제할 테니 현금영수증을 발급해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세법을 들먹이며 "은행은 현금영수증 가맹 등록 의무기관이 아니기 때문에 현금영수증을 따로 발급해줄 수 없다"고 했다.

김씨는 "편의점이나 음식점에서도 소액 카드결제가 가능한데 은행에서 카드가 안 된다는 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면서 "현금영수증 발행을 꺼린다는 것은 자신들의 수익을 밝히지 않기 위해 편법을 쓰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골드바를 판매하는 시중은행 지점에서 고객이 직원과 상담을 나누고 있다.

◆비금융상품 구매 시 현금결제만 가능

백화점 상품권 등에 비해 사용범위가 넓고 일정 금액 내에서 무기명으로 사용이 가능한 '기프트카드'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국내 기프트카드 수요는 꾸준히 늘어 시장규모가 1조원 대로 급성장했다. 주요 은행들은 지점 창구에서 기프트카드를 판매하고 있지만 해당 은행의 카드가 아니면 대부분 신용카드 구매가 불가능하다.

고속도로 휴게소 등에서 신용카드로 충전이 가능한 '선불식 통행카드'도 은행에서 충전할 경우 대부분 신용카드 결제가 안 된다. 계좌에서 돈을 인출하거나 현금을 주고 충전해야 한다.

이밖에 지난 2003년부터 축구협회와 후원계약을 맺고 대표팀 경기 입장권을 독점 판매하고 있는 하나은행 역시 오로지 현금 구매만 허용하고 있다. 하나은행 관계자는 "카드 구매가 안 돼 논란이 있지만 은행은 단지 입장권 판매를 대행하는 곳에 불과하다"며 "입장권을 발급하는 축구협회가 신용카드 구매를 허용하지 않는 이상 어쩔 수 없다"고 밝혔다.

주요 은행들은 창구에서 기프트카드를 판매하고 있다. 해당 은행의 카드가 아니면 대부분 신용카드 구매가 불가능하다.

◆"수수료 부담" vs "도덕적 비난 마땅"

시류에 역행한다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은행권이 신용카드 결제를 꺼리는 이유는 바로 가맹점 수수료 때문이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상품권이나 스포츠경기 입장권 같은 비금융상품 판매 시 은행이 챙기는 수익 자체가 크지 않다"면서 "신용카드 구매를 허용하면 가맹점 수수료 등의 비용부담이 증가하기 때문에 적정 마진을 확보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서영경 YMCA 신용사회운동사무국 팀장은 "공공요금 카드 납부가 확대되고 있는 마당에, 신용카드 발급을 적극적으로 권유하는 은행들은 현금 결제만 고집하는 이중적인 행태를 보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영수 한국신용카드가맹점연합 정책개발위원장도 "은행들은 신용카드 결제를 허용하지 않는 것이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지만 고객 편의를 외면하는 태도는 상식적, 도덕적으로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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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들은 카드 결제를 허용하지 않는 것이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지만 이에 대한 소비자 불만은 끊이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