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부신 햇살, 푸른 바다, 따사로운 바람.

늦은 봄쯤 남유럽 여행을 다녀온 사람이라면 이런 것들을 잊지 못한다. 매끈매끈한 돌이 깔린 뒷골목 길과 야자수 풍광, 그리고 풍부한 해산물 향취는 또 어떤가?

수백 수천년의 역사, 그리고 넘실거리는 에게海의 파도. 지중해의 상큼한 공기, 연안의 하얀 집들. 이런 것들로 세계의 많은 관광객들을 매료시켰던 스페인과 그리스. 정열의 나라, 민주주의를 꽃피웠던 나라들이 그러나 영화롭던 한 때를 뒤로 하고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리스, 스페인 등 지중해 연안 '낮잠(siesta)자는 풍습을 가진 나라들'이 글로벌 금융위기의 와중에서 고전하고 있다. 심지어 그리스는 재정적자 악화로 국가부도 가능성까지 거론되고 있다. 지난해 그리스의 재정적자는 GDP(국내총생산)의 무려 12.7%, 정부부채는 1백10%에 달했다.

시에스타란 스페인어로 '낮잠'이라는 뜻을 가진 말이다. 시에스타는 더운 기후에서 비롯됐다. 지중해 인근 지역은 여름철 한낮은 무척 덥고 밤은 시원한 특성을 갖고 있다. 오후 1시부터 4시정도까지의 시간은 더워 일을 하기 힘들다. 일의 능률이 오르지 않는 더운 한낮에 일을 멈추고 낮잠으로 원기를 회복한 뒤 열심히 일하자는 취지에서 생겼다. 낮잠을 즐긴 후 다시 출근, 저녁 8시, 9시쯤 퇴근한다.

시에스타는 지중해 인근 국가와 비슷한 기후대의 많은 국가에서 나타난다. 스페인을 비롯, 인접 지역인 포르투갈이나 안도라공화국 뿐 아니라 남부 프랑스, 이태리, 그리스, 그리고 바다 건너 멕시코, 아르헨티나와 같은 남미 국가까지도 비슷한 풍습을 갖고 있다. 베트남도 그런 국가들 중 하나이다. 이들 국가에서도 무더운 시간에는 가게문을 닫고 낮잠을 즐긴다.

지난달 무디스(Moody's) 등 국제신용평가사들은 그리스의 신용등급 하향조정을 시작으로 스페인, 포르투갈 등의 외화표시국채 신용등급에 부정적인 신호를 보냈다. 묘하게도 모두 시에스타가 있는 나라들이다. 월 스트리트 저널 (WSJ)은 이들 세 나라에 아일랜드와 이탈리아를 포함, 각국의 머릿글자를 따 PIIGS로 명명, 재정적자가 악화된 요주의 국가로 지명했다. PIIGS는 돼지(pig)에 빗대어 그들 국가를 폄하한 표현이 아니겠는가.

또 다른 국제신용평가사인 피치(Fitch)와 스탠다드 앤드 푸어스(S&P)는 지난해 말 멕시코의 국가신용등급을 BBB로 한 단계 낮췄다. 역시 재정악화를 문제 삼았다.

베트남도 최근 외환보유액 급감으로 상황이 좋지 않다. 국제금융센터는 베트남에 대해 "'09년 2분기 이후 무역적자가 확대되고 물가상승 압력이 높아지고 있어 위기상황이 우려된다"고 분석한 바 있다.

시에스타 때문에 위기가 온 것은 아니겠지만 매우 공교로운 일이다. 시에스타를 즐기는 국가들 중 많은 나라가 금융위기의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는 것.

현지의 많은 사람들은 시에스타를 '신이 내린 은총'이라 여긴다고 한다. 낮잠을 통해 생활의 활력을 얻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위기상황'이다. 잠깐 신의 은총을 물리고 일에 매달릴 필요가 있다.

지난 2005년말 스페인에서는 시에스타를 없애자는 움직임이 구체적으로 일었었다. 스페인 정부가 팔을 걷고 나섰었다. 스페인 정부는 모든 정부 기관은 12시부터 1시까지 점심 식사를 하고 6시에 퇴근하도록 했다.

그러나 민간부문의 호응이 없었다. 시에스타가 '이베리아(Iberia)의 요가', '정신적 웰빙'으로 이미지 변신을 하며 건재했다. 시에스타를 통해 오후 활동을 위한 재충전과 함께 음주 운전, 졸음 운전을 막을 수 있다는 낮잠 옹호자들이 득세했다.

이제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때가 됐다. 긴 점심 시간과 늦은 퇴근으로 다른 유럽 국가들과 비즈니스 스케줄을 맞추기가 쉽지 않다. 당연히 유로존 타국가와의 통화통합 이점을 누릴 수 없다.

또한 시에스타 때문에 스페인 사람들은 밤 10시 이후가 돼서야 저녁식사를 한다고 한다. 잠자리에 드는 시간도 늦어 다른 유럽인들에 비해 수면시간이 40분가량 부족한 것으로 조사됐다. 생산성이 높을 수가 없다. 시에스타를 즐기는 다른 나라들도 이런 점들을 냉정하게 살펴 볼 때가 왔다.

◆박용하는?

산업은행 경제연구소 연구위원. 연구소 내 국제경제팀장을 거쳐 구미(歐美) 경제파트를 이끌고 있다. 한때 국내 일간지에서 경제부·국제부 기자로 다양한 경험을 하기도 했다. 산업은행에선 국제금융부, 국제업무부, 외화자금부, 자금거래실, 런던지점 등에서 근무하며 국제업무를 두루 섭렵했다. 서울대학교 국제경제학과와 고려대 대학원 경제학과를 졸업했고 KAIST 금융공학과정을 거쳤다.